처서, 갈치조림
나는 셋째 딸이다. 얼굴도 보지 않고 데려간다는 셋째 딸이라는 말에 나는 그래서 안 데려가요, 라고 시큰둥하게 답하기도 한다. 아직도 그런 유치한 말을 하는 사람이 꼭 있다. 내게 셋째 딸이란 말은 바꾸어 말하면 아들을 낳기 위해 할 수 없이 낳은 딸이라는 의미였다.
내가 처음 할머니를 보고 들은 첫 마디는 “00네 집이 어디니?”하며 남동생 이름을 대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고 내게 우리 집을 물었으며 일주일 정도 머물면서 나와 남동생을 엄청나게 차별했다. 특히 먹는 걸로. 그랬던 외할머니는 아흔이 넘어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직전 화해를 시도하셨다.
“누구? 셋째? 아이고 내가 니를 왜 못난이라 했을꼬”
어려서 맨날 못난이라 구박하고 맛있는 불고기와 과자와 아이스크림은 남동생만 주던 할머니는 남동생에겐 좋은 할머니였으나 나와 친해지기는 어려웠다. 방송에서는 외갓집이 어떻고, 할머니의 손맛이 어떻고 마음과 다른 말들을 잘도 떠들어댔지만 사실 내게 할머니의 이미지는 그리 좋지 못했다. 외갓집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다만 상상할 뿐이었던 이미지는 제주의 할망민박에서 만났다.
우리나라에 제주도가 있어서 참 다행이라 생각한다. 육지와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사람이 좋고 무엇보다 음식이 맛있다. 휴가철이 끝난 8월 말 9월 초의 제주는 갈치가 맛있을 때인데 이때 혼자 가는 제주도가 나는 제일 좋다.
국민생선 갈치는 구이나 조림으로 주로 먹지만 제주도에서는 회나 국으로도 먹는다. 처음 갈치국이라는 말을 듣고 생각만으로 비려서 그걸 어떻게 먹나 싶었는데 호박과 배춧잎이 들어간 말간 국이 생각처럼 비리지 않고 맛있어서 깜짝 놀랐다. 갈치회도 별미다. 고등어회와 마찬가지로 제주에서 갈치회를 먹었는데 고소하면서도 살짝 기름진 회를 맛있게 먹었다.
그래도 갈치는 조림이 제일 맛있다.
제주 올레길은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에 다녀온 서명숙 여사가 자신의 나라에 그처럼 아름다운 도보 길을 만들자는 약속과 바람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제주 올레에 가기 전 산티아고를 걸었던 나는 산티아고에서처럼 내 몸과 마음의 소리에 따라 걷기로 마음먹고 갔었기에 코스 따위 가볍게 무시했다.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가장 아쉬웠던 것이 일정의 압박이었다. 아무런 계획 없이 갔지만 비행기표 일정이 있었고, 가장 싼 비행기표라 변경 수수료가 무서웠다. 그래서 제주잖아, 하고는 비행기표를 편도로 끊고 갔다. 결국 첫 올레 여행은 18박 19일 동안 7코스 반을 걸었다. 이후 드문드문 걸어 아직도 완주를 못했다. 언젠가 한 달쯤 시간을 내어 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 한 바퀴를 돌고 한라산 둘레길도 가고 싶다 생각하고 있는데, 그게 언제가 될지 아직도 모르는 게 아쉽다.
처음 올레를 걸을 때, 1코스 2코스... 코스의 구성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1코스는 시흥에서 시작해 광치기 해변에서 끝나는데, 광치기 해변 바로 전에 성산일출봉이 있다. 나는 첫날 성산일출봉에서 자고 일어나 다음날 아침에 일출봉에 올라가기 위해 멈췄다.
지금 제주에는 게스트하우스가 많지만 당시에는 그다지 많지 않았고, 특히나 1코스의 끝이 아니라 중간 지점인 성산일출봉에는 펜션과 여인숙이 대부분이었다. 얼마 전에 가보니 개벽천지 카페에 롯데리아, 스타벅스까지 생긴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디 일출봉뿐인가 싶지만 그래도 아직 제주는 사랑스럽다.
성산일출봉에서는 할망민박에 머물렀다. 할망민박은 숙박시설이 부족한 올레길 코스에 할머니들이 혼자 사는 시골집을 개조해 민박으로 제공하면서 시작되었다. 지리산 둘레길에서도 민박을 이용했는데 시설이 조금 불편해도 하루쯤 친척집에 다녀온다 생각하면 좋았고, 선택의 자유가 없지만 웬만한 밥집보다 만족도가 높은 밥상이 좋았다.
지리산 할망민박은 한 겨울에 머물렀는데 딸 오면 주려고 남겨둔 애쑥국에 각종 나물 반찬, 후식으로는 귀한 솔잎차에 직접 만든 곶감을 내주셨다. 친구와 둘이 방값에 저녁과 아침 식사비가 5만원이었고, 마트가 없어서 주인 할아버지의 귀한 소주를 나누어먹었는데 이때도 안주로 곶감과 김치, 나물 등을 챙겨주셨다.
제주에서의 첫 할망민박에서는 7천원에 갈치조림을 내주셨다. 갈치조림과 김치, 밥 한 그릇이 전부인 밥상이었지만 혼자 먹기에는 충분했다. 갈치는 두어 토막이 들었는데 생물로 신선하고 살집이 있었으며 감자와 호박, 김치를 넣고 할머니가 양념해 조린 것이 마음에 들었다. 서울 사람이라고 싱겁게 했는데 입에 맞는지 모르겠다며 걱정하셨지만 짜지 않고 호박과 감자도 달았다. 밥상머리에 앉아 잠깐 주저하며 손주방인데 화장실이 불편해서 어쩌나, 이불은 새 거니 걱정 말아라 몇 마디 더 건네고 나가셨다.
이후에도 제주에서는 이런 할머니들을 많이 만났다. 내가 밥을 먹을 때 옆에 앉아 나물이나 마늘, 식재료들을 다듬으면서 두런두런 얘기를 건네고 잘 먹는 반찬은 더 갖다 주시고, 숭늉도 내주시고 여러모로 챙겨주시는 거다. 상상 속 외갓집 할머니처럼.
제주의 소주, 한라산도 처음 여기서 마셨다. 그런데 더운 여름날, 냉장고에서 갓 꺼낸 시원한 소주에도 얼음을 타서 더 차갑게 먹거나 살짝 언 아이싱 소주를 선호하는 내게 ‘노지’ 소주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동네 슈퍼에 가서 소주를 달라고 했더니 “노지밖에 없는데”하셨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니 냉장고에 시원한 소주가 없다고 덧붙이신다. 이 여름에 소주를 냉장고에 안 넣어놓다니, 할머니가 혼자 하시는 작은 동네 슈퍼라도 너무하지 않은가 싶었지만 냉장고에 넣어뒀다 먹지 하고 사서 돌아왔다.
그러나 할망민박은 말 그대로, 할망민박이었다. 가족들과 함께 살다 자식들 외지로 나가고 혼자 사시는 할머니가 남는 방을 민박으로 내놓는 것이다. 제주의 집은 안거리 밖거리라고 해서 안채와 바깥채 두 채의 집이 같이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중 할머니가 쓰는 안채가 아니고 사랑채 같은 밖거리를 민박으로 내놓는데, 화장실과 욕실을 고치기도 한다지만 내가 간 곳은 그냥 원래의 집 그대로였다.
침대 위에 시트가 아닌 새 이불이 있고, 책상 위에는 원 주인이 읽는 소설책들이 그대로 꽂혀 있었다. 화장실과 욕실도 할머니집에 붙어있는 것을 써야 했으며, 방에 냉장고 따위는 없었다.
처음 마시는 “노지” 소주는 그래서 반도 마시지 못했다. 차갑기는커녕 미지근한 소주는 코로 훅 독한 냄새가 올라왔고, 냄새만큼 맛도 더 독했다. 냉장고에 넣지 않고 상온 보관한 노지 소주의 반대는 시설 소주다. 냉장고에 보관한 차가운 소주. 제주의 주당들은 으레 노지 하얀 거를 마신다. 나도 이제는 제주에 가면 노지 하얀 거를 마시지만 그 때는 아니었다. 노지 하얀 소주는 처음부터 입에 착 붙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맛은 더 강렬했다.
그렇지 않아도 고봉으로 눌러 담은 밥을 남기는 것이 할머니에게 미안해서 밥을 다 먹고 소주를 남겼다. 달짝지근한 호박과 감자에 하얀 갈치살이 입에서 살살 녹았다. 그 이후 어떤 갈치조림도 그 맛을 따라가지는 못했다. 갈치회를 뜨고 남은 연한 뱃살만으로 조려도 살은 맛있지만 조림의 양념이 다른 것이다.
아마도 할머니의 투박한 손맛과 적당한 MSG가 들어갔을 것이다. 할머니들이 소고기 다*다(조미료)를 아끼며 넣으시는 모습은 이후로도 자주 봤다. 조미료가 특별한 비법이라는 듯이 넣으면서도 그게 손맛이고 자연의 맛이라 하시는 것이다. 누군가의 비법 양념이 라면스프이듯이 할머니는 육지(도시)에서 온 조미료가 귀한 것이었을까? 하긴 비싼 소고기가 20% 이상 들어간 다*다는 고향의 맛이라 하지 않는가.
둘째 날은 새벽에 일어나 성산일출봉을 오르고 광치기해변을 지나 2코스의 거의 끝까지 갔다. 20킬로미터 넘는 길이라 힘들었고 점심으로 김밥을 먹어 저녁은 제대로 먹고 싶었는데 게스트하우스에서 파티가 있다고 했다. 이 파티의 지옥에 빠져 나는 계획을 바꾸고 게스트하우스에서 8일을 머물며 올레꾼들과 한라산도 가고, 관광도 하고, 해수욕도 하며 그야말로 놀멍 쉬멍 걸으멍 올레와 제주를 즐겼다. 그리고 이곳에서 노지 소주의 참맛을 배웠다.
S는 안경을 쓰고 체크남방에 똘똘이 스머프 같은 인상이었는데 노지 하얀 거에 대해 거의 예찬하는 지경이었다. 21도의 한라산 소주를 상온 그대로 마시면 술 맛이 더 진하고 마실수록 본연의 맛이 살아난다는 것이다.
나의 해석은 좀 달랐다. 하우스 재배하는 귤보다 노지 귤이 맛있는 것처럼 제주에서는 시설에서 뭔가 더하는 것보다 자연의 것이 더 맛있다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육지보다 모든 것이 귀한 제주에서 굳이 비용과 시간도 더 많이 들여 본연의 맛을 해치는 것을 싫어할 수도 있다. 또 차가운 술은 혀를 마비시켜 맛을 잘 못 느끼게 하는데 취하라고 먹는 술을 차갑게 해서 먹으면 술값만 더 들 뿐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S는 나와 동갑이었다. 선배가 갑자기 전화해서 50만원 있냐고 묻더니 제주에 왔단다. S의 선배는 직장 때문에 올라가고 나는 제주도를 여행하는 내내 S와 함께 다녔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이 S와 제주에서는 그렇게 죽이 잘 맞고 재미있게 지냈는데, 서울에 와서는 금방 시큰둥해졌다. 여행지에서 낯선 사람과 잠깐의 짜릿한 연애가 늘 그렇듯이.
하긴, 요즘 서울에서도 제주도 소주를 파는데 서울에서는 그냥 차가운 시설 소주가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