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홍해삼
낮술에는 밤술에 없는 그 무엇이 있는 것 같다.
넘어서는 안 될 선이라거나, 뭐 그런 것.
- 박상천, <낮술 한잔을 권하다>
제주에 갔을 때, 한 친구가 말했다.
“이번 여행의 목표는 낮술이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40대가 되도록 낮술 한 번 못 마셔 보았다고 하는 K는 학원 원장으로 입시컨설턴트 전문가였다. 학원은 입시철에만 바쁜 게 아니란다. 1년 열두달 새벽부터 밤까지 학원은 거의 24시간 풀타임으로 돌아간다 했다. 그래서 혼자 여행 한 번 가 보는 것이, 낮술 한 번 마셔보는 것이 소원이라 했다.
K는 결국 아내에게 생활비 외에 200만원의 용돈을 주고 혼자 제주 비행기를 타고 왔으나 일주일이 넘도록 낮술을 못 마셔봤다고 했다.
“아니 일주일 동안 무엇을 했길래?”
“글쎄?”
40평생 낮술을 못 마셔봤다는 것보다 제주에 온 지 일주일 동안 낮술을 못 마셨다는 것이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주만큼 낮술 마시기 좋은 곳이 또 어디 있다고!
나는 낮술 예찬론자다. 방송국이 첫 직장이었고 방송작가로 십수 년을 살아온 내게 낮술은 일하면서도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즐거움 중에 하나였다. 사실은 아침생방송을 많이 해서 밤술 마실 시간이 없어 낮술, 혹은 아침술을 많이 마셨던 것도 있다.
일주일 단위로 돌아가는 아침 생방송을 마치고 회의까지 끝내면 보통 오전 10시 전후다. 전 날 밤을 꼬박 새워 아침에 방송을 내보내고 나면 그 날 쉬고 다음날 아침부터 출근해야 하므로 마음 편하게 술 마실 시간은 밤보다 아침이다.
그래도 사람은 해가 떠 있는 낮에 활동하고 밤에 자는 것이 일상적이듯 술도 낮보다 밤에 마시는 것이 일상적이라 낮술은 묘한 매력이 있다. 금기를 깨뜨리고 사과를 먹었던 이브처럼,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처럼 낮술 몇 잔이면 눈이 환하게 밝아지고 세상이 달라진다. 금지선 앞에서 멈칫거리다 마치 넘었을 때의 짜릿한 쾌감이 낮술에서 더 빛을 발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 말을 들은 바로 그 날, 열심히 올레길만 걸었다는 K를 끌고 예정했던 올레길도 걷지 않고 낮술을 마시러 갔다. 이제 갓 스물이 되어 역시나 낮술을 마셔본 적 없다는 P도 함께.
한때 낮술의 미학이라는 소모임을 이끌며 낮술을 일상으로 여겨온 나지만 두 명의 첫 낮술 입문자를 위해 안주를 고르는 게 고민이었다.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에게 어디 가서 뭘 먹을까요 물었다.
“홍삼 먹어봤니”
“홍삼이요?”
“해삼 중에 뱃대기가 붉은 홍해삼이라는 게 있는데...”
앗 나도 그때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새로운 안주의 출현이었다. 익숙하고 아는 맛도 좋지만 이렇게 새로운 맛에 불끈 힘이 솟기도 하는 것이다.
“메뉴판에는 없을 거야. 내가 말했다 하고 달라 하면 숨겨놓은 것 줄 거고
내 이름 대도 없으면 진짜 없는 거니 어쩔 수 없고”
사장님이 말해 준 해녀의 집은 올레 1코스 광치기 해변과 동일주도로 중간에 위치해 있었다. 워낙 허허벌판에 있어 찾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홍해삼을 찾으니 얼굴을 다시 한 번 본다. 사장님 이름을 대니, “알았어”, 하고는 대뜸 “밖에서 먹어!”한다. 그리고 “홍삼만 줘? 다른 것도 줘” 덧붙인다. “알아서 주세요.” 하고 물러났다.
제주에서 가장 적응 안 되는 것이 반말과 뚱함이다. 알고 보면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인데 왜 이렇게 말투는 그렇게 비호감인지. 한글날 특집으로 육지와 멀어 고어가 많이 살아있는 제주어를 방송하면서 알았는데 바람 때문이라 한다. 바람이 심한 제주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에게 정확하게 말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짧고 강하게 발음하는 것이 좋고 그러다 보니 말의 어간만 살고 어미가 사라졌다 한다.
사장님은 마당에 파라솔 식탁을 차려준다. 술집은 자그마한데 마당이 넓었다. 넓은 마당은 주차장이면서 한편 술집의 확장인데 자리에 앉아보니 과연 풍경이 좋다. 멀리 성산 일출봉이 한 눈에 들어오는데 그 사이에 인공적인 것이 하나 없다. 날이 흐려 꼬물거리고 바람이 불긴 했지만 탁 트인 것 풍경에 마음이 평안해진다.
“날이 흐리니까 마음이 편해.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모르겠어.”
“제길, 햇살이 쨍해야 낮술이 더 맛있는데...”
아쉽지만 그래도 낮술의 입문자 두 명과 나도 처음 먹어보는 홍해삼에 대한 기대로 우리 세사람은 눈을 반짝이며 첫 잔을 비웠다. 찌르르 하니 위장을 훑고 내려가 창자에 닿는 느낌... 좋다.
“어때?”
“아직 잘 모르겠어”
“낮이나 밤이나 뭐...”
낮술 첫 잔에 대한 품평은 그냥 그랬다. 안주가 나왔다. 홍해삼은 진짜 붉었다. 사장님은 성게와 함께 우니도 내오셨다.
“이거 귀한 거야.”
먼저 홍해삼을 하나 집어 입에 넣는데 앗, 이가 안 들어간다. 그렇지 않아도 꼬득꼬득한 해삼에 백 배쯤 더 꼬득하다. 힘을 주어 겨우 오독오독 씹는데 아, 바다가 그대로 내 안에 들어온다.
“어때?”
“이게 뭐예요?”
“요즘 홍삼이 잘 안 잡혀. 그래도 홍삼 한 번 먹어보며 해삼은 싱겁지.”
바다의 인삼이라 불리는 해삼 가운데서도 홍해삼은 제주나 남도에서 주로 잡히는데 홍조류를 먹어 배에 붉은 빛이 돈다. 양식이 불가능하고 해녀가 직접 채취하는 자연산으로 찬바람 나는 겨울에 주로 나지만 구경조차 못하는 날이 많아 메뉴판에 적어놓을 수도 없다고 한다.
성산 일출봉을 마주하고 앉아 귀한 바다의 맛, 홍해삼을 오독오독 씹으며 노지 한라산(냉장고에 보관하지 않은 소주)을 마시니 술이 나를 마시는지 내가 술을 마시는지 모르겠다.
몇 잔을 마시고 보니 문득 홍해삼을 들어본 기억이 떠오른다.
“인삼도 홍삼이 좋잖아. 홍해삼 맛은 진짜 죽인다. 갖다 줄 수도 없고 내가 다 먹었다”
4박 5일 제주 자전거 투어를 떠났던 H가 문자로 알려줬던 게 이거로구나. 평소에도 소개팅 코스며 지방 맛집을 알려달라고 하던 H는 외국계 회사에 다녀 휴가도 연차도 자유로웠다. H가 취직하기 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여행했던 설악산과 속초 바다가 떠올랐다. 그 때도 바다에서 회 대신 해산물 풀코스를 먹으며 행복했던 기억... 그래 나도 이제 홍해삼 맛 안다 이놈아, 하는 생각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무슨 생각해?”
그 날, 40대의 낮술이 처음인 K는 홍해삼에 성게와 우니를 먹으며 덜컥 부인이 생각났다고 했다. 자신도 처음인 혼자 떠나는 여행이지만 사실 부인도 혼자 여행을 가본 적이 없구나. 휴가를 언제 가봤는지 기억도 잘 안 나고, 부인이 언제 여행을 해봤을까 미안하다고.
군입대를 앞두고 제주에 온 20대의 J는 여자친구를 생각하고 있단다. 혼자 여행을 오겠다고 했더니 여자친구가 화를 냈는데 그 때는 이해가 안 가더니 지금 이렇게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곳을 보고 있자니 함께 올 것을 왜 혼자 왔는지 모르겠다. 내일이 생일인데 왜 이곳에 내가 혼자 와 있는지 모르겠다고.
우리는 그렇게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세상 제일 맛있는 안주와 낮술을 즐기며 서로 다른 사람들을 생각했다. 첫눈이 내린다 하여 소설인 11월 말, 아직 첫눈 소식은 없고 홍해삼이 간절하게 떠오르면서 어쩌면 음식은 추억이 반이 아닐까 싶다. 그 추억은 음식의 맛보다 사람이 더 크게 좌우한다.
이제 그 날도 추억이 되었다. 낮술이 밤술로 이어지고 결국 드라마 촬영이 한창이었던 섭지코지에서 밤술을 마신 우리는 결국 J의 생일 축하선물로 성산일출봉에 올랐다. 성산일출봉의 일출을 보려면 삼대가 덕을 쌓아햐 한다더니 그 날은 우리는 마음속으로 일출을 보았다.
이제 추억의 그 날 홍해삼을 떠올리며 누구와 더불어 완벽한 추억을 완성할까 궁리한다. 우선 멋진 애인이 필요하고 둘이 함께 이맘때에 제주에 갈 여유가 필요하고 그 날 그 집의 해녀가 홍해삼을 잡아 놓고 우리를 기다려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기 위해서는 몇 대의 덕을 쌓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