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설, 석화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나면
어색하지만 않길
편한 모습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인사하면서 그렇게 스쳐가길 바래
- 김연우, 토이,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나면>
헤어진 연인과 길에서 우연히 마주칠까 하는 걱정 한 번쯤 해보았을 것이다. 특히 모임이나 직장, 생활반경이 겹치는 상대라면. 그에게 초라해 보이지 않도록, 그가 마음 아프지 않도록 혹은 너와 만날 때보다 나 더 잘 지내고 있다고 보여주기 위해, 더 열심히 내 자신을 꾸미고 다니게 되는 것이다.
K와 헤어지고 나서가 그랬다. 그 때 나는 여의도 오피스텔에서 살았는데 그의 직장이 있는 건물과는 불과 10분 거리도 되지 않았다. 건물을 나와 건널목 3개쯤 건너면 그의 직장이었다. 그 중간에는 식당가가 몰려있어 그도 그 어디선가 매일 점심을 먹고 저녁 회식을 할 터였다.
츄리닝 바람으로 편의점에 가다가,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다가 혹시 그와 마주치면 어쩌나, 나는 현관 전신거울 앞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점검하거나 선글라스와 모자를 푹 뒤집어 눌러 쓰고 아무도 못 알아볼 모습으로 외출했다. 결국 두 달을 못 버티고 이사를 했다.
그 때는 몰랐다. 엉뚱하게도 ‘서로가 소홀했는데 / 덕분에 소식듣게 돼’라는 두 줄의 시가 현실이 되어 K와 다시 만날 줄을.
인도에 출장 중인 K는 심심한 어느 날 저녁, 카톡으로 내게 하트를 보내왔다. 애니*의 인기가 그 정도인 줄 몰랐고, 하상욱의 <서울 시>가 이토록 내게 공감을 이끌어낼 줄 몰랐다.
뭘 입지, 화장은, 어디서 만나, 뭐 먹는데...?
그가 서울에 오기까지 열흘은 그야말로 쏜살같이 흐르고 드디어 만났다.
“나 이 동네 살았는데”
“나도... 한 번쯤 지나쳤을지 모르겠네”
12월의 어느 날, 상수동에서 우린 만났다. 그와 나는 각각 이사를 했고 한동안은 같은 동네에서 살았다. 마트에서 편의점에서 밥집에서 우리는 어쩌면 스쳐 지나쳤을까?
“여기 좋다. 취향이 바뀐 건가?”
“나 원래 이런 곳 좋아했는데...”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어. 오늘 신경 쓴 건가?”
“그래?”
그 날, 나는 열흘 동안 성공한 다이어트에 따스한 날씨까지 도와줘 살랑이는 분홍색 쉬폰 블라우스에 베이지색 스웨이드 반바지, 코트를 입고 13센티미터 부츠를 신었다. 그리고 작은 카페 겸 레스토랑에서 주인 언니에게 스페셜 런치를 부탁했다. 언니는 오븐에 구운 야채샐러드, 애피타이저로 라임과 양파, 딜로 맛을 낸 석화, 스테이크까지 신경 쓴 메뉴를 준비해 주었다.
“맛있어?”
“응, 굴 맛있네. 참, 석화 좋아했지”
K와 밤을 달려 서해에 도착했을 때는 너무 늦은 시간이라 문을 연 집이 한 곳뿐이었다. 굴찜을 시켰는데 굴은 달았고 감칠맛이 좋았으나 양이 너무 많아서 둘이 엄청 열심히 먹고도 반 이상 남겼다. 한 밤중에 우리의 하는 짓이 웃겨서 웃었고, 손에 장갑을 꼈지만 굴 냄새가 오래 가서 그것 때문에 돌아오는 차에서 또 한참을 웃었다.
둘 다 너무 바빴고 퇴근 시간이 늦어서 레스토랑 같은 곳에 온 적이 거의 없었다. 그 때 맛집 프로그램을 했는데 늘 사무실에 갇혀서 전화로만 일했다. 아이템 찾고 섭외하고 구성안 쓰고 그러다 정작 김밥이나 배달음식으로 때우는 일이 많았다.
대신에 K와 만나면 지금 아니면 못 먹는다며, 뭐는 어디를 가야 제대로라며 늦은 시간에도 멀리까지 운전해 가서 맛있는 것을 양껏 먹고 돌아왔다. 대개 그런 곳에서 먹는 음식이란 굴찜, 대하, 황태, 더덕삼겹살, 도다리쑥국, 밀복, 물회 등등 나의 아이템이나 그 후보였으므로 그는 나의 입맛이 딱 시골촌놈 입맛이라고 놀리곤 했다. 석화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먹어봐야 방송글 쓰는 데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땐 내 마음대로 하는 게 많았지. 사실 내 마음대로가 아니라 필요해서였는데’
말해야 할 것이라도 다 말할 필요는 없다. 이제 그에게 이해를 구해서 바뀔 것은 없다. 밤에 만나는 것보다 낮이 나을 것 같았는데 막상 점심을 먹고 나니 어색했다. 회의가 있다고 둘러대고 차는 다음에 마시자 했다. 그 다음은 영영 없을 것 같았지만.
K와 헤어지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아 다시 가게로 갔다. 주인 언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샤도네이와 석화를 내 앞에 밀어주었다. 집에 가서 밥통 끌어안고 먹는 대신 난 샤도네이를 천천히 마셨다. 굴은 또 끝내 다 먹지 못하고 남겼다. 와인의 과일향과 미네랄의 맛이 오랫동안 입안에 남았다.
다음 날, 진짜 미팅을 하러 나가는데 전화가 왔다. K였다.
“지금 어디?”
“미팅 가는 중인데”
“혹시 목동 오고 있니? 나 000 사무실인데...”
아니 당신이 왜 거기에 있지? 결국 그 날 미팅이 끝나고 저녁 늦게 차를 마셨다. 그는 프로덕션 본부장과 친구였고, 사무실에서 기다리다가 벽에 붙은 연락처에서 우연히 내 이름을 보았다고 했다. 영영 없을 것 같았던 다음이 바로 그 다음날이 될 줄 몰랐지만 한편으로는 그 전 날 만나길 잘 했구나 생각했다. 아니었다면 그 날 사무실에서 갑자기 맞닥뜨리고 얼마나 어색했을까.
어제와 사뭇 다르게 청바지에 운동화, 점퍼를 입고 립스틱만 바른 편안한 복장이 새삼 부끄러웠지만 그 날은 그 전 날 만나고 또 보는 것이라 어색하지 않았다. 그래서 편하게 차를 마시고 아무렇지 않게 스쳐갈 수 있었다.
헤어지고 다시 만난 연인이 성공할 확률은 3%라고 한다. 그런데 사랑에 있어 성공이란 무엇일까? 만남은 계속적인 과정이지 끝이 아니다. 헤어짐도 영영 끝이 아니라는 것도 이제는 알겠다. 어제 마신 와인의 피니쉬가 오늘 문득 다시 느껴지기도 하고, 손에 밴 굴향이 한 해가 지나 또 그 계절이 되면 그리움으로 찾아오는 것처럼...
See you ag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