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지, 지리산길 배추전
대미필담 [大味必淡]
정말 좋은 맛은 반드시 담백한 것이라는 뜻
서북면옥(since 1968)
제철 음식은 간단할수록 맛있다. 서북면옥의 평양냉면이 그 간결하면서도 깊은 맛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가게 가운데 커다랗게 액자로 해서 걸어놓은 이 말 덕분이기도 하다. 요리사들도 자주 말한다. 좋은 요리는 자연이 내고 요리사는 적당히 간을 할 뿐이라고.
일 년 중 낮이 가장 짧은 동짓날 추운 밤에는 뜨끈한 배추전이 좋다. 배추전은 간단한 음식 중에서도 훌륭한 술안주다. 전을 맛있게 부친다고 야단 떨 것도 없다. 아니 야단 떨면 안 된다. 노랗고 적당한 두께의 배춧잎을 골라 밀가루에 소금, 물만으로 반죽해 부치면 그만이다. 전을 좀더 맛있게 하려고 계란이나 부침가루를 쓰는 건 배추전의 맛을 모르는 이들이다. 밀가루도 많이 하지 말고 얇게 묻히는 듯 마는 듯 해야 맛있다. 물론 간단한 안주일수록 술은 더 술술 잘 넘어가서 배추 한 통을 다 부쳐야 할 수도 있다.
배추전은 경상도음식이다. 밀양 외할머니가 부쳐주던 배추전은 밀가루맛만 나서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입맛에 배추전은 너무 심심했을지도 모른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동짓날은 아세(亞歲), 작은 설이다. 태양의 고도가 낮아져 날이 가장 짧아졌다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니, 태양의 부활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동지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내게 동지는 평양냉면보다 더 심심하고 간단한 배추전의 맛을 알게 된 어른 입맛의 탄생이다.
추운 겨울날 배추전의 맛을 알게 해 준 건 지리산 둘레길, 수성대 할머니다.
수성대는 지리산 둘레길 3코스 인월-금계 구간의 초입에 있다. 인월에서 3킬로미터가 되지 않으니 보통은 1시간 정도면 도착해 지나치기 쉽다. 그러나 겨울에 눈이 쌓이면 두 어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중간 참을 먹기 딱 좋은 곳이다.
이틀 전, 고속버스가 체인을 감아야 한다고 정차할 때부터 불안하더니, 밥집 아주머니는 자기 생에 처음으로 이렇게 많은 눈을 본다며 수선을 떨었다. 결국 첫날 내 다리는 세 시간도 못 걷고 고장이 났다. 무릎까지 쌓인 눈길에 이정표도 보이지 않아 헤매는 바람에 고관절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결국 아무 민박집에서 자고 다음 날에야 인월에 왔다. 그 날은 여행을 포기하고 서울로 돌아가려는 참인데 햇살이 너무 좋고 다리도 괜찮아진 것 같았다. 정작 둘레길은 3시간을 걸은 게 전부였으니 아쉬울 수밖에. 하루만 더 걸어보자 하며 둘레길 3코스를 걸었다.
도보 2-3분은 무조건 택시였던 내가, 걷기를 좋아하게 된 건 까미노 데 산티아고 800km 도보 순례길을 다녀온 이후부터다. 길을 걸으면 모든 음식이 맛있다. 난 까미노에서 뭐든 먹을 수 있는 나의 식성을 깨달았고, 제주 올레에서 노동주, 막걸리의 맛을 즐기게 되었다.
무엇보다 길 위에서는 모두가 힘이 들고 힘이 들면 바닥이 나오지만 그 다음에는 본래의 선함이 다시 나온다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애인이 생기면 한 번쯤은 함께 걸어봐야 한다. 여행 취향이 맞는 것도 중요하다. 어릴 때 이상형은 니트가 잘 어울리는 남자(적당히 넓은 어깨와 프리랜서)였으나 취미가 맞지 않으면, 여행 스타일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돈 많고 잘 생겨도 소용이 없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Y는 제주 올레길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지리산 둘레길을 여름에 걸었는데 너무 좋아서 겨울 둘레길의 눈풍경이 궁금했고, 나도 걷는 여행을 좋아하니 우리의 첫 여행으로 겨울 둘레길은 최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해 겨울, 지리산에는 유난히 눈이 많이 왔다.
걷기 시작하고 두어 시간 만에 다시 고관절이 아파왔다. 그 날도 길에는 아무도 없어 온 천지를 전세 낸 듯 좋았으나, 가도 가도 끝없는 눈밭에 눈이 시렸다. 여름보다 겨울에 고글이나 선글라스가 왜 필요인지 그때 처음 알았다. 잠깐 쉬고 낮술이나 마시면 좋겠다. 가방 속 음식을 먹다가는 그대로 얼어버릴 듯 바람이 매섭게 춥다. 딱 그 때, 눈 속에 빨간 포장의 간이매점이 보였다. 진심 반가워 가방을 내려놓고 모닥불부터 쬐기 시작했다.
“뭐 줄까? 눈이 와서 포장이 걱정돼 왔지 장사하러 나온 게 아니라 별 게 없는데...”
이틀 전에 눈이 많이 오긴 왔나 보다. 그래도 그래서 다행이다. 아니었으면 추운데 할아버지 할머니가 나오지 않았을 테니까. “아무거나 주세요” 하니 김치와 호박죽을 내주신다.
“동지엔 팥죽을 먹어야 하는데 그래야 진짜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건데..
눈 때문에 손님도 없을 것 같고 할아버지 좋아하는 호박죽만 끓였지.
그 안에 팥알 좀 있을 거야.”
호박죽이 찰지게 달고 그 안에 굵은 팥알이 씹힌다.
“집에서 담근 막걸리도 줄까?”
시골집에 놀러 가면 할머니가 이렇게 꺼내주는 걸까? 할머니에 대한 좋은 추억이 별로 없는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막걸리를 넙죽 받아 마셨다. 걸쭉한데 살얼음이 살짝 낀 막걸리가 묵직하면서도 술술 잘 넘어간다. 전이 있으면 좋겠다 싶은데, 파전을 하나 구워주신다. 할머니들의 냉장고는 요술냉장고라더니 아이스박스에서 뭐가 계속 나온다. 호박죽 한 그릇에 막걸리와 파전 한 장, 김치도 그릇째 쓱싹 비우고도 할머니가 또 뭔가 부치자 눈길이 간다.
“배추전 먹을 줄 알아? 이건 여기 사람들이나 먹는 건데...”
결국 할머니는 우리 앞에 배추전과 막걸리 한 잔을 더 내놓으신다. 막걸리 한 잔 털어넣고 배추전을 쏘옥 입에 넣는다. 첫 맛을 감상하기도 전에 입에서 살살 녹아 없어졌다. 배추전을 찢으려는데 나무젓가락이라 잘 안 된다. 할머니가 다가와 손으로 척척 찢어주신다.
“날 춥다고 우리 집 양반이 안 나오려고 하는 걸 델꼬 나왔어.
장사한다고 저러고 불만 쑤석이고 있길래 부친 건데.”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주려고 부쳤기 때문일까. 기름진 밀가루와 달달한 배추의 만남으로도 환상적인데, 살짝 언 노란 배추속잎의 알싸한 맛이 슬쩍 묻어나는 것이 내 인생 최고의 배추전이었다. Y의 젓가락에 걸린 마지막 것을 빼앗아 먹을 정도로.
배추전에 가장 좋은 배추는 추운 겨울날 눈 속을 파헤쳐 얻는 것이라고 한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고향집에 돌아온 김태리가 배는 고픈데 아무 것도 없으니, 밭에 나가 손을 호호 불며 파헤쳤던 바로 그 배추 말이다. 김장을 하려고 심었다가 가을에 거두고 남은 쭉정이 배추 중에 몇 포기는 그렇게 눈 속에서도 자란다. 눈 이불을 덮고 추위를 버티며 조금씩 천천히 자란 배추는 고소하면서도 알싸하니 살짝 매운 맛을 감추고 있다.
그 이후, 추운 겨울밤이면 배추전에 걸쭉한 막걸리를 들이켜고 싶어진다. 그러나 시장이 반찬인 것처럼 맛있는 배추전과 막걸리를 위해서는 적당한 노동=걷기 후, 등으로 찬바람을 맞으며 앞에 뜨거운 장작불을 끌어안고 먹어야 제맛이다. 겨울은 추워야 한다지만 요즘 겨울은 정말 너무 춥다. 시시때때로 영하 10도를 밑도는 강력 한파에 집밖은 위험한데 수성대 할아버지는 좋겠다. 동지팥죽 대신에 할아버지 좋아하는 호박죽 끓여주고, 맛난 배추전도 부쳐주는 할머니가 옆에 있어서.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