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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ueVada Sep 19. 2024

쉬어가는 문턱

남편의 백수 이야기

"오늘 저녁에 메뉴가 뭐야? 비빔밥 한다고? 와~ 맛있겠네"

뜬금없이 전화로 누구에게 물어보는 저 말투, 자랑인게지? 같이 일하는 동료언니가 큰소리로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집에 친정엄마가 같이 사나?라고 생각했는데.. 금방 자기야~라고 상대방을 부른 것도 같다.

알고 보니 남편이 뒤늦게 신학대학을 다니시는 늦깎이 전도사님이란다. 그래서 풀타임 일하는 와이프를 위해 저녁을 차려놓고 기다리는 모양이다.

그 언니 나이가 그 당시 한 40대 중후반인 거 같았는데 왠지 그때 물어보던 그 말투를 나도 언젠가 한번 써먹을 수 있을까? 상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15년이 지났다. 6살 연상인 남편에게 잘 대들지도 못하는 30대 초반이었던 나는 어느덧 한마디 하면 두 마디로 말대답하는 겁 없는 20년 차 워킹주부가 되었다. 하지만 한 번도 퇴근할 때쯤 남편에게 밥 뭐해놨냐고 전화할 일은 없었다. 그저 동료들과 회식자리가 있을 때 카톡으로 "오늘 밥 먹고 들어가~"라고 객기를 부려보는 정도였다.

그런 하늘 같은 남편이 갑자기 일이 생겨서 20여 년째 계속해오던 비즈니스를 문 닫게 되었다.

오래된 직원들에게 소식을 알리고 문 닫을 준비하고, 그렇게 나는 옆에서 상황들을 지켜봤지만 계속 실감이 안 났다. 꿈만 같았다. 그저 아침에 눈을 뜨면 어렴풋이 남편이 조용히 일어나 출근 준비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꿈이라고 믿고 싶었던 건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점점 현실로 다가왔고 어느덧 내가 먼저 조용히 일어나 출근준비를 하며 도시락을 싸서 조용히 집을 나오고 있었다.

남편이 백수라는 걸 아이들에게는 큰 문제처럼 발표를 했다. 혹시라도 아이들이 일찍 철이 들어 아르바이트라도 해서 용돈을 벌어오겠다고 마음을 먹어볼까 하고.. 역시 딸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바로 동네 피자가게에서 파트타임을 시작했다. 아들은 공부한다고 책상 앞에는 앉아 있지만 당최 씨알도 안 먹힌 듯 백수 아빠 소식에 대한 비포 에프터가 똑같은 것 같다. 혹은 아직 현실에 와닿지 않나 보다 내가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남편은 하루하루 뭔가 할 일을 찾아가며 지루하지 않으려고 그전날 계획을 세우며 백수생활을 충실히 하고 있다.

마당청소, 리사이클 정리, 아들 보이스카웃 프로젝트 준비, 딸하고 쇼핑등.. 은근 하루가 금방 지나간다고 했다.

조만간 그때 동료언니가 했던 것처럼 당당하게 저녁메뉴를 물어보는 건 가능하리라 믿는다. 이제는 엄연하게 내가 이 집의 가장이 됐으니까 그 정도의 큰소리는 칠 수 있겠지?

하지만 매일마다 퇴근하고 와서 남편의 눈치부터 살폈다. 어느 날은 아주 밝은 모습으로 나를 반겨주고 또 어느 날은 좀 복잡한 심정의 모습으로 반겨준다.

워낙에 걱정이 많은 사람이라 이런 하루하루가 매일 편하지만은 않겠지..

하지만 그렇게 찡그린다고 뭐가 해결되랴 싶은지 며칠이 지나자 다시 밝은 모습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그래서 15년 만에 드디어 뭐가 먹고 싶다고 저녁때 해놓으라고 시켜 보았다. 그날따라 더운 여름날이어서 남편은 땀을 닦아가며 갈비와 냉면을 준비하고 있다.

뭐를 하나 시키면 아주 깔끔하게 잘하는 남편, 간이 딱 맞고 아주 맛깔스럽다.

냉면도 면발이 탱탱하니 잘 삶았다.

인생이란 게 앞으로 잘하면 50년.. 아니면 30년.. 그것도 아니면 20년? 정도 우리 앞에 남았으리라. 그남은 시간 속에 남편이 손수 해주는 저녁상을 받아먹으며 살면서 이런 날도 있었어야지~ 웃어주며 남편을 치켜세워본다.

"나보다 낫네~ 뭐든 잘해 우리 남편!"

앞으로 우리 남편의 앞길에는 어떤 여정이 기다리고 있을까? 이렇게 쉬어나가는  문턱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마음을 잘 가다듬는 순간들이 되기를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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