맏딸이 항상 좋은 성적을 유지하길래 고등학교 9학년 여름방학 때 둘이서 보스턴과 필라델피아, 그리고 뉴욕등을 한 바퀴 돌고 온 적이 있었다. 하바드, MIT 등의 아이비 대학을 구경하면서 엄청 기대를 했었는데,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고 딸의 성적은 좋았지만 운이 없었는지 동부 쪽에 신청했던 대학교에서는 아무 연락이 없었고, 결국 북부의 작은 사립대에 들어갔다.
둘째인 아들은 누나보다 성적이 훨씬 낮아서 그저 집 근처 아무 대학이라도 들어갔으면 하고 기대를 1도 안 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장학금 많이 받고 동부의 준 아이비 대학에 떡하니 입학하게 되었다. 이 녀석은 정말 100% 운으로 들어갔다. 앞으로 4년 내내 그 운빨이 오래가야 할 텐데, 그도 아니면 4년 내내 열심히 공부를 따라가야 할 텐데 엄마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그렇게 아들이랑 대학교에 가는 길이다.
이 학교는 큰 도시에 있는 것이 아닌지 직항 비행기가 없는 것인지 아침 꼭두새벽부터 공항에 와서 비행기를 탔는데 현지 시간으로 오후 6시가 되도록 여태껏 도착하지 못하고 하늘에 떠 있는 중이다. 정말 동부가 멀긴 멀다. 아직도 30분의 시간을 더 가야 한다니 살짝 피곤함이 몰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만 가면 도착하겠네 생각하니 기대도 된다.
20년 동안미국에 살면서 주야장천 엘에이에서만 살아와서 가끔 다른 타주에 갈 일이 생기면 참 기대된다. 친구가 애틀랜타에 살아서 두세 번 갔었는데 갈 때마다 느낀 건 동네가 참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뉴욕이 부산 같다면 애틀랜타는 청주 같은 분위기이다.
지금 가는 펜실베이나 주의 제2도 시라는 피츠버그는 또 어떤 느낌일까? 딸이 사는 포틀랜드도 참 특이했다. 거긴 좀 강원도 분위기 같았다. 산으로 바다로 모두 다 신비하고 깨끗한 느낌.
아들이 이렇게까지 멀리 갈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물론 대학입시준비 때 너 맘껏 다 신청해 봐라 했지만 그건 그냥 나중에 후회 안 하려고 해 보라고 한 것이었다. 아들은 UC Irvine이 꿈의 학교였다. 우리 집에서 1시간이면 갈 수 있고 내 직장에서는 더 가까워서 금요일 저녁에는 회사 끝나면 아들 찾으러 갈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아들은 물론 UCI에도 붙었다. 웨이팅이 풀렸을 때는 동부와 중부 사립대가 너도나도 입학허가가 떨어져서 행복의 비명을 질러야 했었다.
아들 덕분에 다시 한번 깨달았다. 세상 사는데 너무 기대하지 말아야겠다고. 소박하게 겸손한 마음으로 인내심을 갖고 최선을 다하면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을.
아들을 평생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남편의 눈에 요즘은 하트가 뿅뿅이다. 정말 '우리 남편이 달라졌어요'라는 TV프로라도 만들고 싶다. 이렇게 아들~아들~ 하며 살갑게 대할 줄이야! 그전에는 사내놈이 약해빠졌네, 공부 안 하고 게임만 하네 어쩌네 하면서 아들을 썩 맘에 들어하지 않았었다.
어떻게 보면 아들 때문에 종종 부부싸움도 했던 것 같다. 나는 대부분 아들을 감싸는 분위기였고 남편은 항상 아들의 방을 시도 때도 없이 뒤지며 뭔가 찾아내려는 셰퍼드 같았다. 그렇게 뭔가를 찾아내면 나한테 난리를 치고 그다음 아들을 불러다가 혼내고 또 걸리면 그때는 집에서 쫓아낸다고 엄포를 놓고, 그렇게 아들의 고등학교 시절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런 남편이었는데 좋은 대학에서 입학허가통지 메일을 본 후에는 180도가 바뀌었다. 늦게까지 친구랑 전화하는 목소리가 들려도 사내놈이 사회성이 좋네, 그러고 게임을 하루종일 하고 있어도, 내버려 두어 지금 안 놀면 언제 저렇게 놀겠어! 하면서 나보다 더 관대한 부모의 모습이 되어있다. 모든 것이 다 용서되었다. 게다가 나한테 아들 너무 잘 키웠다고 비싼 명품시계도 사주었다. 아들 때문에 와이프가 맘고생한 건 알았나 보다.
뒤돌아보면 우리 아들을 낳고 내게 당근과 채찍이 많았다. 아들을 못 낳았다면 아들 낳을 때까지 계속 애를 낳아야 했을 것이다? 남편이 3대 독자 아들이어서 4대에도 대를 이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첫딸을 낳고부터 긴장이 됐다. 다행히 둘째 때 아들을 낳고 다리 쭉 뻗은 채 몇 주 동안 침대에서 밥을 받아먹고 정말 공주대접을 다 받아봤다.
아들이 건강하게 자라줘 집안에는 항상 웃음꽃이 피었었다. 조용하신 아버님이지만 손자에게 어찌나 사랑을 표현하시던지 매일 목마 태우시고 항상 아버님 배 위에 올려놓고 계셨다. 기저귀도 아마 아버님이 제일 많이 갈아주셨을 것이다.
아들이 9살 때 학원 앞에서 교통사고가 나서 큰일 나는 줄 알았다. 차와 부딪히면서 애가 날아갔다가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진 거라 온몸에 멍이 시퍼랬다.
그런데 천사가 안아주었는지 어린애 몸에 뼈하나 부러진 게 없었다. 그 당시 태권도장을 매일 갔었는데 그 어린 게 낙법을 터득한 걸까? 퍼런 멍이 쉽게 없어지지 않아서 걱정이었지 그 외에는 다 멀쩡했다.. 정말 할렐루야다!
내 인생의 역동기에는 언제나 아들의 스토리가 뒷받침하고 있었다. 교회 소그룹 모임에서 돌아가며 서로의 간증을 나눌일이 생기면 나는 그때마다 주저 없이 꺼내었던 우리 아들의 스토리들. 나를 이렇게 성장시킨 것도 우리 아들 덕분이리라.
옛말에 아들엄마는 구르마 끌고 딸엄마는 비행기 탄다고 하지만 이제는 아들 때문에도 비행기 탄다. 지금 내 옆에 비행기 창가자리에 앉아 쿨쿨 자는 아들이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