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라는 영화가 한참 신문과 언론에 자주 거론 되길래 무슨 영화인가 궁금해서 관람해 보았다. 잔잔한 독립영화라는 것만 알고 굳이 내용에 대해 기대를 하지 않고 본 영화지만 나에게 다가온 그 느낌은 나도 저런 이민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에 큰 공감이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우리 가족은 남미에 있는 아르헨티나의 시골 '산타페'라는 도시에 무작정 이민을 갔었다. 우리가 살던 서울 끝자락의 동네가 철거에 들어갔었고 그때 받은 보상금으로 우리 가족은 이민 갈 밑천을 마련하고 비행기표를 구입했다. 그 당시 한 동네 사시던 이웃들은 그때 받은 돈을 가지고 새로 설계된 동네로 이사해서 아파트도 구입하고 번듯하게 살게 되었다던데, 왜 우리 가족은 그때 이민바람이 들어서 그 귀한 돈을 홀라당 이민수속에 다 털어부 었는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늦은 나이었지만 재기하고 싶어 하셨고 엄마도 그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다. 힘없는 나는 그저 부모님을 따라 비행기를 타고 올 수밖에.
중학교 3학년의 나이에 기대가 부풀어 아메리카 대륙을 밟아 보았지만 상상이하의 그 펼쳐진 모습에 좌절했었다. 80년대 한국에서 온 가족이 땅만 바라보고 이민 왔다는 사실은 '미나리'에 나온 미국의 어느 도시와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이 살지 않는 시골 동네라 모기, 하루살이 같은 건 애교에 불과했다. 밤이 되면 우리 집만 덩그러니 집 앞에 가로등이 있었는데 거기에 몰려온 세상천지의 곤충과 두꺼비 등의 파충류까지 나는 기겁을 해서 해가 지면 밖을 나가본 적이 없었다.
나중에 20대가 넘어 한국에 방문을 하고 동창들을 찾아보니 다들 내가 미국으로 이민간 줄 알았단다. 그만큼 남미 아르헨티나라는 나라는 80대 후반 88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생소한 나라였다.
그당시는 국제전화도 하기 힘들때였고, 인터넷이란 단어는 상상조차 힘들었던 시절이어서 글을 쓰고 읽는 수단으로 1달이 넘게 걸려 도착하는 편지와 부에노스 아이레스라는 아르헨티나 수도권에서 만든 교포들을 위한 월간지가 전부였다. 그 월간지를 읽고 또 읽으면서 그때부터 글쓰는것과 출판사에서 일하는게 꿈이 되어 나중에 20대에 드디어 그 월간지를 만드는 출판사에서 첫 직장일을 하게 된다.
지나고 보면 아르헨티나로 이민 간 덕분에 내 스페인어는 퍼펙트할 수 있었다.
그리고 10대 후반을 힘들게 살았더니 3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아무리 날씨가 더워도 다 잘 참을 수 있고 어떠한 지저분한 곳이라도 눈살 찌푸리지 않고 가서 잠을 청할 수 있다. 그 덕분에, 교회에서 몇 번 멕시코로 선교하러 가서도 나는 뭐든지 맛있게 먹고 잠도 꿀잠을 잤다. 사람에게 경험이란 것은 참으로 중요해서 한번 그렇게 밑바닥을 내려가 보면 그다음에는 무서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