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용기, 그리고 아버지의 전립선암
얼마 전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영화 '범죄도시3'의 빌런으로 활약한 이준혁 배우가 출연했다. 드라마를 잘 챙겨보지 않는 우리 부부가 정말 몰입해서 봤던 작품이 <비밀의 숲>이었는데, 거기서 그가 연기한 서동재 검사는 얄미울 정도로 잘생겼으면서도 끝내주게 야비한 기회주의자였다. 그 캐릭터가 워낙 인상적이어서 서동재를 주인공으로 한 스핀오프 드라마가 나온다는 소식에 내심 반가워하던 차였다.
아무튼, 그가 유퀴즈에 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요즘 정말 행복하시겠어요. '나는 행복하다' 이렇게 시원하게 한 번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유재석의 이 말에 그는 갑자기 멈칫하더니, 뜻밖의 대답을 내놓았다.
"제가 사실... 행복하다는 말을 못 합니다."
행복하다고 말할 때마다 거짓말처럼 너무도 좋지 않은 일들이 벌어졌던 터라, 이제는 그 말이 무서워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유재석이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며 "그래도 이제는 괜찮을 테니 한 번만 해보시라"고 권유했지만, 이준혁은 끝내 그 말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며 재석 님이 조금 과하게 권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의 거부감은 깊어 보였다.)
아내는 그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내면에 숨겨진 본질적인 우울함과 불안에 깊이 공감하는 눈치였다. 반면 나는 이제껏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라거나 "삶이란 본래 우울하고 허망한 것이다"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언젠가 아내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화들짝 놀라며 되묻기도 했다. "아니, 어떻게 삶이 우울하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할 수가 있어?"
사람마다 타고난 기질은 참 다르다. 노력으로 조금 더 건강하게 다듬을 수는 있겠지만, 본질적인 성향 자체를 바꾸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 같다. 나와 아내는 무척 비슷한 듯하면서도, 이 지점에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그래도 10년 넘는 세월 동안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빈 곳을 채워주며 살아올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결혼 전 프러포즈 때 약속했던 '함께 살아가며 조금씩 더 나은 인간이 되는 것'에는 다행히 성공하고 있는 듯하니 말이다.
7월이 되어서야 결과가 나온다고 체크해 두었던 어느날이었다. 아버지의 전립선암 전이 여부를 검사한 결과가 나오는 날. 나 역시 과거에 갑상선암 확진을 받았을 때, 암 그 자체보다도 주변 림프절이나 다른 조직으로의 전이 여부를 기다리던 시간이 가장 지옥 같았던 기억이 있다. 진료실로 향하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요동쳐서, 복도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들릴까 봐 걱정했을 정도였으니까.
다행스럽게도 아버지의 암세포는 전립선에만 국한되어 있고, 주변 다른 조직들은 깨끗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만약 전이가 발견되었다면 약물 치료를 하며 피 말리는 시간을 보내야 했을 테고, 최악의 경우 수술조차 힘들어질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휴대폰 너머로 검사 결과를 담담하게 전하는 동생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나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장통에서 힘들게 장사하며 두 아들을 건사하신 부모님. 그중에서도 아버지는 언젠가부터, 대략 15년 전쯤부터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만하면 정말 행복하다. 더는 바랄 게 없다." (어머니께서는 딸이 없는 걸 여전히 안타까워하시지만..)
부모님 바람대로 두 아들이 모두 좋은 짝을 만나 가정을 꾸렸고, 손주들도 건강하게 자라고 있으니 자녀 세대의 안정을 당신 인생의 성적표로 삼으시는 부모님 기준에서는, 아버지야말로 마음껏 행복해하셔도 될 자격이 충분했다.
한편 어머니는 늘 아버지의 건강을 자신의 자랑거리처럼 여기셨다.
"저렇게 술을 마셔대도 간에 이상이 없단다. 저렇게 담배를 피워대도 폐가 멀쩡하단다."
실제로 예순까지는 아버지의 '강철 간'이 버텨주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일흔이 넘어가면서부터 기계가 아닌 아버지의 몸도 여기저기 고장이 나기 시작했다. 하루에 소주 1~2병은 기본으로 비우시는 당신. 어머니가 떨어질세라 꼬박꼬박 채워넣어 주시는 그 소주가 만병의 근원이라 생각하는데, 결국 눈도 치료를 받아야 했고, 무릎도 삐걱거렸고, 치아도 말썽이었다. 그래도 큰 병은 없다며 자부하셨는데, 이번에 받아든 성적표가 '전립선암'이었으니... 두 분이 느끼셨을 실망감과 순간적인 절망감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문득 엉뚱한 생각이 스쳤다.
아버지의 그 "나는 행복하다~"라는 노래가, 이준혁 배우가 걱정했던 것처럼 불행을 불러온 것일까?
누군가 "나 행복해!"라고 말하는 순간,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저 멀리서 지켜보다가 "어허, 네가 행복하다고? 감히? 좋아, 그럼 지금부터 불행 맛 좀 봐라!" 하며 고난을 던져주는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큰 병에 걸리거나 불행이 닥치면, 지난날 자신이 누렸던 행복을 자책하곤 한다.
'어쩐지 요즘 좀 행복하다 했어.', '행복하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말 걸 그랬어.' 스스로 입방정을 떨어서 부정 탔다고 여기며 괴로워하는 것이다.
하지만 의학과 과학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우리가 겪는 많은 질병은 유전의 영향이 매우 크다. 단순히 부모님 탓이라는 게 아니라, 거슬러 올라가면 나의 증조부, 고조부 때부터 유전자 속에 새겨진 인자들의 작용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평생 골초로 살아도 폐가 깨끗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술고래 중에서도 간이 멀쩡한 사람이 있지 않은가. 질병이든 사고든, 그것이 내가 행복을 느꼈다는 사실과 인과 관계가 성립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니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 불행을 불러올까 봐, 억지로 덜 좋은 척하고 덜 기뻐하며 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차피 시간은 흐른다. 주변 어른들을 관찰해 보면, 나이가 들수록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것들이 점점 많아진다.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상황이 허락하지 않아서.
지금 한 번 더 웃고,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고, 가족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다가오는 행복을 굳이 징크스라며 피하지 말고, 어제에 오늘 하루만큼의 기쁨을 더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의미 있는 삶 아닐까.
이준혁 배우의 개인사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감히 내가 그의 아픈 과거를 어루만질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 그가 TV에 나와, 눈치 보지 않고 아주 편안한 얼굴로 "저, 요즘 참 행복합니다"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도, 수술 잘 받으시고 다시 "이만하면 행복하다"고 말씀하실 수 있기를.
행복은 아껴 쓰는 게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