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싱크대 앞에 서는가
"설거지를 할 때는 오직 설거지만을 해야 한다. 설거지를 하는 동안은 설거지가 내 삶의 가장 중요한 일이어야 한다." — 틱낫한 (Thich Nhat Hanh), 『화』 중에서
“아! 설거지 뷰가 아주 끝내준다니까!”
아내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설거지 뷰’라니. 역세권이나 학세권은 들어봤어도 설거지 뷰가 좋은 집이라니. 하지만 설거지를 좋아하는 나에게 그건 꽤 강력한 설득 포인트였다. 나는 이미 좋은 설거지 뷰를 조건으로 내세운 아내의 설득에 한 차례 넘어간 적이 있었고, 그때의 만족도가 상당히 컸으므로 이번에는 얼마나 더 좋아질까 내심 기대도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세 번째 이사를 했다.
아내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 어정쩡하게 개발되고 있던 신도시의 황량한 공사 현장을 바라보며 그릇을 닦던 나는, 이제 푸르른 나무들이 우거진 개천을 따라 아름답게 펼쳐진 산책로를 바라보며 그릇을 문지른다. 계절마다 색을 바꾸는 나무들, 그 아래를 걸어가는 사람들, 그리고 천변을 따라 흐르는 물길. 그 평화로운 풍경을 보고 있으면 고무장갑을 낀 손놀림이 한결 경쾌해진다. 역시 아내의 안목이란.
“당신은 왜 그렇게 설거지를 열심히 해?”
어느 날 저녁, 싱크대 앞에서 접시를 문지르던 내 뒷모습을 보던 아내가 웃으며 물었다. 질문은 가벼웠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그 자리에 가만히 박혀버렸다. 뭐랄까... 먹고 난 흔적을 지우는 일만큼은 어쩐지 내 무대 같았다. 판을 깔아놓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작은 무대 위에서 매일같이 연출가처럼, 때론 철학자처럼 굴었다.
나는 원래 조금 진지하다. 아내는 가끔 “피곤한 스타일”이라고 말한다. 모서리 끝에 햇빛이 살짝 걸려 반짝이면 괜히 가슴이 먹먹해지고, 밤길에 깜빡이는 가로등을 보면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중얼거리는 사람. 그런 내게 설거지는 유난스러운 사색을 합법적으로, 게다가 생산적으로 할 수 있는 드문 시간이었다.
고무장갑을 끼고 수세미에 세제를 묻히는 순간, 나는 단순한 가사 노동자의 자리에서 한 발짝 옆으로 비켜선다. 물과 거품이 오가는 얇은 경계 위에서, 나는 감독처럼 카메라 동선을 잡고, 철학자처럼 문장을 고르고, 작가처럼 장면을 이어 붙인다. 내 손에 잘 맞는 수세미를 가지고, 좋은 향이 나는 주방 세제를 풀어 적당한 양의 거품을 내고, 뽀드득 소리가 나도록 그릇을 헹궈내는 일. 그것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간이다.
사실, 이 책이 세상에 나오기 전 작은 소동이 있었다. 요조 작가의 『아무튼, 떡볶이』를 처음 보았을 때가 기억난다.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소재 하나로 이렇게 맛깔난 글을 쓸 수 있다니. 이후로도 많은 ‘아무튼’ 시리즈가 나왔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몰입하는 세계가 그렇게나 다양할 줄이야. 그런데 서점을 아무리 둘러봐도 아직 『아무튼, 설거지』는 없었다. ‘옳지, 이거다. 나는 설거지를 좋아하니까.’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해당 출판사에 메일을 보냈다. “제가 설거지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아하는데, 책으로 써보면 어떨까요?” 이미 책을 낸 지인은 “답장을 받는 일 자체가 기적에 가까우니 너무 기대하지 말라”고 조언했지만, 나는 내심 기대했다. 이토록 진심으로 설거지를 사랑하는 남자의 이야기라니, 먹히지 않을까?
결과는?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세 곳의 출판사 중 두 곳은 침묵했고, 한 곳에서는 정중한 거절의 답장을 보내왔다. 좋은 제안이지만 기획 방향과 맞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감사하고 뼈아픈 거절이었다. (C 출판사, 흥하세요!)
그 거절 덕분에 나는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쓰려는 이야기가 단순히 “아무튼 설거지가 최고야!”라는 가벼운 예찬이었을까? 아니다. 나는 그보다 더 깊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매일 반복되는 노동 속에 숨겨진 삶의 비애와 기쁨, 더러워진 것을 닦아내며 마음을 정화하는 시간, 그리고 묵묵히 가족의 뒷바라지를 하는 가장의 뒷모습에 대하여.
그래서 나는 ‘아무튼’이라는 가벼운 깃털을 내려놓고, 조금 더 묵직한 제목을 짓기로 했다. 딱딱하게 굳은 밥풀 같은 삶의 고단함을 따뜻한 물에 불리고, 오만과 욕심의 거품을 씻어내고, 마침내 깨끗해진 빈 그릇처럼 마음을 비워내는 시간. 그리하여 이 책의 제목은 『불림과 비움의 시간』이 되었다.
미리 고백하건대, 나는 글보다는 말이 편한 사람이다. 20년 넘게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 입만 열면 “너희들 잘 되라고 하는 소린데”라며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이 직업병이 되어버렸다. 혹시 이 책의 어떤 구절이 꼰대의 설교처럼 느껴진다면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길. 타인이, 제자가, 그리고 독자가 조금이라도 더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앞서서 생긴 ‘오지랖의 거품’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좋겠다.
이 책은 설거지를 더 잘하는 법을 알려주는 실용서가 아니다. 매일 반복되는 가사 노동을 향한 애써의 박수도 아니다. 오히려 ‘해야만 해서’ 하는 그 시간 속에서 우연처럼 건져 올린 문장들, 그 문장 덕분에 조금은 쉬워진 다음 날의 표정을 기록해두려는 시도다. 싱크대 앞에 서 본 사람이라면, 고무장갑을 한 번쯤 뒤집어 말려본 사람이라면, 뽀드득 소리의 쾌감을 아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이야기를 담고 싶다.
설거지를 하다 보면 우선순위를 정하게 된다. 기름진 그릇을 먼저 닦을지, 깨지기 쉬운 유리잔을 먼저 닦을지. 그 순서도 결국 ‘살아가는 법’의 은유다. 오늘 나는 무엇을 먼저 다루고, 무엇을 잠시 내려놓을 것인가. 쓰임을 다한 수세미를 쓰레기통에 넣는 날이면, 이형기 시인의 ‘낙화’가 저 혼자 자막처럼 올라온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잘 쓰고, 잘 보내고, 다시 맞이하는 일. 깔끔한 마무리에는 슬픔과 해방이 동시에 있다.
자, 이제 장갑을 끼고 물을 튼다. 거품이 피어오르는 사이로 우리의 작은 장면들이, 닦아내야 할 아픔들이, 그리고 비워내야 할 욕심들이 하나씩 떠오를 것이다.
지금, 당신의 싱크대 앞은 어떤 풍경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