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의 시간

하루의 끝, 나로 돌아오는 의식

by 로벤

1장. 설거지의 시간

"우리가 반복적으로 하는 행동이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러므로 탁월함은 행동이 아니라 습관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1. 하루의 끝, 나로 돌아오는 의식

우리 집 부엌 창으로 저녁이 진다. 해가 골목의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와 마지막 힘을 짜내듯 색을 쏟아붓는 시간, 창틀은 매일 다른 색의 테두리를 얻는다. 아내와 나는 그 시간대를 ‘칵테일 하늘’이라고 부른다. 레시피는 매번 다르다. 미세먼지가 없는 날은 오렌지빛 베이스에 자두색 시럽을 한 방울 떨어뜨린 것처럼 쨍하고, 흐린 날은 우유를 많이 탄 라떼처럼 희뿌연 회색빛 거품이 도시 위에 무겁게 내려앉는다. 나는 퇴근길 꽉 막힌 도로 위 운전대 앞에서도, 아파트 입구 차단기가 올라가는 그 짧은 순간에도 자꾸만 고개를 들어 그 하늘을 찾는다. '오늘의 칵테일'을 눈으로 확인해야 비로소 퇴근이 실감 나기 때문이다.


도어록이 ‘띠리릭’ 소리를 내며 풀리고 현관문을 열면, 집 안의 공기가 훅 끼쳐온다. 아이들이 벗어둔 신발이 제각각 방향을 틀고 놓여 있고, 거실에서는 TV 만화 주제가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뒤섞여 들려온다. 그 소음은 평화롭다. 하지만 내 귀에는, 내 몸의 감각에는 아직 학교의 소음이 웅웅거리고 있다. 쉬는 시간 복도를 가득 메우던 아이들의 아우성, 교무실 전화벨 소리, 동료 교사의 한숨 소리, 그리고 회의 시간의 건조하고 딱딱한 공기가 내 옷깃 어딘가에 보이지 않는 미세먼지처럼 묻어 있는 기분이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곧장 부엌으로 향한다. 넥타이를 풀거나 옷을 갈아입는 것보다 먼저 하는 나만의 의식이다. 식탁과 싱크대 위는 그야말로 처참한 전쟁터다. 오늘 하루 우리 가족이 치열하게 살아낸 풍경들이 접시의 표면에 고스란히 눌어붙어 있다. 프라이팬 가장자리엔 아이들이 저녁으로 먹은 볶음밥의 노란 기름띠가 굳어 있고, 밥그릇엔 말라비틀어진 밥풀 몇 알이 훈장처럼 붙어 있다. 유리컵 바닥엔 말라붙은 우유 자국이 하얀 링을 그리고, 아내가 마신 커피잔 입구에는 붉은 립스틱 자국이 선명하다. 숟가락에 묻은 붉은 김치 국물, 젓가락 끝에 매달린 말라버린 당면 조각, 싱크대 거름망에 걸린 파 조각들까지. 이 어질러짐은 단순한 더러움이 아니다. 우리라는 작은 집단이 오늘 하루도 무사히 먹고, 마시고, 대화했다는 명확한 발자국이자, 가장(家長)인 내가 수습하고 마침표를 찍어야 할 오늘의 마지막 과제다.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고르고 수도꼭지를 오른쪽으로 비튼다. “쏴아아—” 거센 물줄기가 스테인리스 바닥을 때리며 사방으로 튀어 오른다. 신기하게도 그 요란한 물소리가 터져 나오는 순간, 뇌 속을 맴돌던 학교의 잔상들이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듯 멈춘다. 예전의 나는 퇴근 후에도 학교라는 공간을 벗어나지 못했다. 소파에 앉아서도 머릿속엔 해결하지 못한 교육청 공문 문구가 떠다녔고, 내일 1교시 수업 준비에 대한 압박감이 가슴을 눌렀으며, 학부모의 날 선 항의 전화를 복기하느라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몸은 집에 있지만 정신은 여전히 교무실 내 책상 앞에 묶여 있었다. 그 보이지 않는 끈이 가족들의 발목까지 잡아끌어, 즐거워야 할 저녁 식탁의 분위기를 무겁게 침전시키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내게는 ‘스위치’가 있다. 분홍색 고무장갑을 손에 끼고, 수세미에 세제를 두 번 펌핑하여 거품을 풍성하게 내는 그 순간, 나는 ‘김 선생님’이라는 무겁고 딱딱한 외투를 벗고 ‘생활인 김 씨’로 돌아온다. 물은 약간 뜨거운 편이 좋다. 손등 핏줄이 살짝 붉어질 정도의, 뜨거움과 시원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묘한 온도. 그 온기가 두꺼운 고무장갑을 뚫고 전해져 오면, 잔뜩 긴장했던 어깨 승모근이 스르르 풀린다. 흐르는 물줄기가 그릇뿐만 아니라 뇌의 주름 사이사이에 낀 피로와 긴장, 타인의 시선까지 씻어내린다. 그제야 내 안의 어휘가 달라진다. “성적, 입시, 생활지도, 행정, 예산” 같은 날카롭고 건조한 단어들이 배수구로 빠져나가고, 그 빈자리에 “오늘, 저녁, 우리, 맛있다, 따뜻하다” 같은 둥글고 부드러운 말들이 차오른다.


나는 그 싱크대 앞에서 비로소 완벽한 ‘분리’를 성취한다. 실수 하나에도 예민해져야 했던 학교의 나와, 조금 헐렁하고 실없는 농담을 던져도 괜찮은 집의 나. 그 둘 사이에 투명하고 맑은 수막(水幕)이 생긴다. 하얀 세제 거품은 장난처럼 피어올라 그 경계를 가볍게 장식한다. 이때의 나는 눈에 보이는 그릇을 닦고 있지만,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하루의 찌꺼기를 지우고 있는 셈이다. 그 지움 덕분에 나는 비로소 거실을 향해, 아이들을 향해 진짜 웃는 얼굴로 돌아설 수 있다.

이전 01화프롤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