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 하나, 인생 하나
2장. 그릇에 담긴 이야기
"물건은 사랑받을 때 비로소 진짜가 된단다. 아이가 인형을 오래오래 사랑해서 털이 다 빠지고 눈이 떨어져 나가도, 그건 망가진 게 아니라 진짜가 된 거야." — 마저리 윌리엄스, 동화 『벨벳 토끼』 중에서
1. 가족의 밥상, 설거지의 기억
찬장 문을 열면 우리 가족의 15년 연대기가 지층처럼 쌓여 있다.
가장 아래칸, 이제는 손이 잘 닿지 않는 구석에는 결혼할 때 아내가 혼수로 해 온 하얀 코렐 접시 세트가 터줏대감처럼 자리 잡고 있다. 신혼 초, 그 접시들은 눈이 부시게 하얗고 매끄러웠다. 설거지를 마치고 물기를 닦아 접시들을 포개어 놓을 때면, 접시와 접시 사이의 맑은 공기가 빠져나가며 ‘폭-’ 하고 서로를 안아주는 듯한 소리가 났다. 얇고 가벼우면서도 단단한 그 그릇들이 층층이 쌓이는 소리가 좋아서, 나는 괜히 몇 번이고 다시 들어 올렸다 놓기를 반복하곤 했다. 그것은 이제 막 시작하는 우리 가정의 경쾌한 배경음악 같았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 그 그릇들을 꺼내 주방의 밝은 형광등 아래 비춰보면 세월이 보인다. 칼질에 긁힌 미세한 스크래치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고, 모서리엔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이가 나가 있다. 바닥 굽의 유약은 닳아서 거칠거칠하다. 마치 우리 부부의 눈가에 하나둘 늘어가는 잔주름처럼, 쓰임의 자국들이 겹겹이 내려앉았다. 그 거친 질감을 손끝으로 쓸어볼 때마다 묘한 애틋함이 밀려온다.
이따금 그 낡은 접시에 거품을 칠하다가 손길이 멈춘다. 하얀 거품 사이로 15년 전의 어느 저녁이 슬라이드 필름처럼 지나간다. 요리에 서툴던 신혼 시절, 아내가 인터넷 블로그 레시피를 보고 야심 차게 도전했던 크림 파스타. 비주얼은 그럴싸했지만, 소금 조절에 실패해 한 입 먹자마자 혀가 아릴 정도로 짰던 기억. “으악! 이거… 건강 생각해서 소금물로 소독한 거지?” 내 짓궂은 농담에 아내가 얼굴이 빨개져서 “먹지 마! 버려! 다시 시켜 먹자!” 하고 접시를 뺏으려던 장면. 우리는 서로를 보며 한참을 낄낄대고 웃었다. 결국 파스타는 반도 못 먹고 남겼지만, 텅 빈 콜라병만 덩그러니 놓여 있던 그날의 식탁은 어떤 고급 레스토랑보다 즐거웠다. 그 짜고 시원했던 웃음소리가 이 접시의 스크래치 사이에 화석처럼 끼어 있다.
또 다른 대접 하나를 집어 든다. 첫째 아이의 이유식을 담았던 작은 사기그릇이다. 믹서에 곱게 간 단호박 미음이 노랗게 담겨있던 그릇. 숟가락을 입에 가져다 댈 때마다 아이가 아기 새처럼 입을 벌리고, 나와 아내를 번갈아 보며 눈을 반짝이던 그 경이로운 순간들이 이 그릇에 묻어 있다. 둘째가 “나도 혼자 할 수 있어!”라며 고집을 피우다 식탁 아래로 엎어버렸던 국그릇도 여전히 현역이다. 국물이 엎질러져 엉망이 된 바닥을 닦으며 “괜찮아, 그럴 수 있어”라고 말해주던 나의 젊은 날도 거기 있다. 기억은 물에 젖으면 색이 선명해지는 수채화 같다. 바싹 마른 상태에서는 보이지 않던 추억들이, 따뜻한 물이 닿으면 선명하게 되살아나 나를 그 시절로 데려간다. 나는 설거지를 하는 게 아니라, 매일 밤 시간 여행을 하는 중이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찬장의 풍경도 지각 변동을 겪었다. 한때는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뽀로로 젓가락과 곰돌이 모양 식판이 상석(上席)을 차지하던 시절이 있었다. 아이는 자기만의 식판이 생겼다며 밥을 먹다 말고 곰돌이 귀를 만지작거리며 좋아했다. 나는 설거지할 때마다 그 곰돌이의 얼굴을 조심조심 닦았다. 혹시라도 거친 수세미에 귀여운 눈코입이 지워질까 봐 부드러운 스펀지로 살살 문질렀다.
하지만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다. 수세미질이 수천 번 반복될수록 곰돌이의 코 프린팅이 조금씩 벗겨져 나갔다. 곰돌이의 코가 완전히 지워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될 즈음, 아이는 더 이상 그 식판을 찾지 않았다. “아빠, 나도 이제 엄마랑 똑같은 유리컵에 물 줘. 나 이제 애기 아니야.” 이제 찬장엔 아이들의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컵 대신, 어른들의 것과 비슷한 투명한 유리컵과 사기그릇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아이들의 성장은 기특하지만, 찬장에서 밀려난 플라스틱 그릇들을 볼 때면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몽글몽글해진다.
코가 지워진 곰돌이 식판은 이제 찬장 가장 위칸, 일 년에 한 번 꺼낼까 말까 한 곳으로 유배되었다.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가끔 대청소를 하다가 그 식판을 꺼내 먼지를 닦고 물로 한 번 헹군다. 쓰지 않아도 닦는다. 그것을 닦는 일은 내 아이의 유년 시절을 다시 한번 어루만지는 일이라서다. 내 손바닥만 했던 아이의 등, 젖내 나던 머리카락, 나를 올려다보던 그 무구한 눈동자를 닦아내는 기분으로 나는 낡은 식판을 헹군다.
어느 저녁, 설거지를 마무리하며 건조대에 그릇을 쌓다가 뜬금없이 울컥한 적이 있다.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그릇들이 주방 조명 아래서 반짝거리는 모습이 너무나 숭고해 보여서였다. 묵묵히 뜨거운 국물을 담아내고, 날카로운 젓가락질을 견디고, 다시 뜨거운 물샤워를 견뎌낸 뒤 내일의 밥상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 저 단단한 침묵들.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말을 건넸다. ‘고마워. 오늘도 우리 가족의 허기를 책임져줘서. 아무 불평 없이 깨져주고, 닳아줘서 고마워.’
이용당한 것에게, 쓰임으로 닳아가는 것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것. 이것이 내가 그릇들에게서 배운 예의다. 설거지는 단순히 더러움을 씻어내는 노동이 아니다. 매일 밤 우리 집 박물관의 유물을 닦고 보존 처리하며, 가족의 역사를 기록하는 큐레이터의 경건한 마감 업무다.
2. 그릇 하나, 인생 하나
설거지를 하다 보면 깨닫는다. 그릇을 다루는 법과 사람을 대하는 법이 놀랍도록 비슷하다는 것을. 싱크대라는 작은 학교에서 나는 매일 밤 인간관계론 실습을 한다.
무겁고 두꺼운 스테인리스 냄비를 닦을 때가 있다. 바닥에 눌어붙은 탄 자국은 부드러운 스펀지로는 어림도 없다. 거친 철 수세미를 꺼내 힘을 주어 박박 문질러야 한다. "어디 한번 해보자!" 하고 힘을 주면, 냄비는 '끼익끼익' 소리를 내며 저항하다가 결국 깨끗한 속살을 드러낸다. 이런 그릇은 직설적인 사람 같다. 빙빙 돌려 말하면 알아듣지 못하고, 오히려 명확하고 강하게, 때로는 논쟁적으로 부딪쳐야 본심이 통하는 사람들. 학교에서도 그런 동료가 있다. 회의 때마다 얼굴을 붉히며 언성을 높이지만, 끝나고 나면 "아까는 내가 좀 과했지? 미안해" 하고 쿨하게 손을 내미는 사람. 그들과의 대화는 피곤하지만, 한번 통하고 나면 뒤끝 없이 개운하다.
반면 와인잔이나 얇은 유리컵은 어떤가. 스테인리스를 다루듯 힘을 줬다가는 그 자리에서 피를 보고 만다. 뜨거운 물을 확 부어버려도 안 된다. 급격한 온도 차에 스스로 깨져버리니까. 이런 사람을 대할 땐 내 손의 힘을 9할쯤 빼야 한다. 깃털처럼 가볍게 쥐고, 미지근한 물로 천천히 헹궈줘야 한다. 교실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는, 목소리가 작고 눈물이 많은 아이 같은 존재들. 그들에게 필요한 건 논리가 아니라 ‘온도’다. 내가 너를 조심스럽게 대하고 있다는 그 느낌만으로도 그들은 맑게 빛난다. 나는 이 컵을 닦을 때마다 며칠 전 상담했던 아이의 젖은 눈망울을 떠올리며 손에 힘을 뺀다.
뚝배기 같은 도자기는 겉보기에 단단해 보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숨구멍들이 있다. 세제 물에 오래 담가두면 그 구멍으로 세제를 머금었다가 나중에 뱉어낸다. 겉은 멀쩡해 보여도 속으로 꽁하니 담아두는 사람과 같다. 이런 사람에게 무심코 던진 농담은 그 숨구멍 깊이 박혀 썩는다. 그래서 맑은 물로, 흐르는 물로 오래오래 헹궈줘야 한다. 오해가 남지 않도록. "그때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어"라고 몇 번이고 진심을 보여줘야 그제야 품고 있던 쓴물을 뱉어낸다.
가장 난감한 건 나무 도마다. 칼자국이 난 틈새로 음식물이 끼고, 습한 곳에 두면 금세 곰팡이가 핀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곰팡이가 필 때가 있다. ‘별일 아니야’ 하고 어두운 곳에 덮어둔 서운함들이 시커멓게 번지는 순간. 나무 도마는 락스로 닦는 게 아니라 햇볕에 말려야 한다. 관계의 곰팡이도 그렇다. 끄집어내어 양지로 가져와야 한다. 카페의 밝은 조명 아래서, 혹은 산책로의 햇살 아래서 "그때 나 좀 서운했어" 하고 투명한 빛 아래서 말려야 균이 죽는다.
그리고 결국, 언젠가는 그릇이 깨진다. 아이가 뛰어가다 식탁을 치는 바람에 내가 아끼던 머그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쨍그랑!"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나는 아이를 혼내기보다 먼저 빗자루를 찾았다. 큰 조각을 쓸어담고, 청소기를 돌리고, 마지막엔 물걸레로 바닥을 훔쳤다. 다 치운 줄 알았는데, 며칠 뒤 발바닥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아주 작은 유리 조각이 박힌 것이다. 관계의 파탄도 이와 같다. 큰 싸움이 끝나고 화해했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뒤, 혹은 몇 달 뒤에 불쑥 그때의 가시가 튀어나와 찌른다. "다 끝난 줄 알았는데..." 그래서 깨진 것을 수습하는 데는 생각보다 훨씬 더 긴 시간과, 집요할 정도의 세심함이 필요하다.
설거지는 그릇을 닦는 일이지만, 사실은 매일 밤 내 손끝의 감각을 조율하는 훈련이다. 힘을 뺄 때와 줄 때, 기다릴 때와 닦을 때, 햇볕이 필요할 때와 물이 필요할 때를 구분하는 법. 그릇 하나에 인생 하나가 담겨 있고, 나는 오늘도 그 수많은 인생을 조심스럽게 닦아 건조대에 올린다. 이 조심스러움이 내일 내가 학교에서, 가정에서 만날 사람들을 지키는 힘이 될 거라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