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장모님
어머니
비상계엄 사태가 일어난 지 얼마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대구에 계신 부모님께 안부 전화를 드리곤 하는데, 그때는 수화기를 들기까지 꽤 망설여졌다.
두 분 모두 열렬한 지지자이셨고, (말씀은 안 하셔도 거실엔 늘 특정 달력이 걸려 있었기에...) 최근까지도 아버지는 대통령에 대한 굳은 믿음을 내비치셨던 터라, 전화를 걸기에는 참 애매한 타이밍이었다.
며칠 전 아내가 "대구에 전화 한 통 드릴 때 되지 않았어?"라고 물었을 때도 나는 손사래를 쳤다.
"응~ 근데 지금은 때가 아니야. 전화해서 뭐라고 말씀드리나? ㅋㅋ"
혹시나 뉴스 보며 가슴 아파하고 계신 건 아닌지, 아니면 어르신들 모이는 집회에라도 가셨다가 험한 꼴을 보시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섰다. 복지센터에서 만나는 또래분들과 정치 이야기하다 얼굴 붉히는 일은 없을까 싶기도 했고.
그렇게 3~4일 정도를 더 묵히다가, 이제는 더 미룰 수 없다 싶어 조심스레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아이고~ 오랜만이네~"
수화기 넘어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밝다.
"어허~ 어머니, 시국이 시국인데 잘 지내고 계십니까?"
조심스러운 내 물음에 어머니는 쿨하게 답하신다.
"에헤이~ 잘 지내고 못 지내고 할 게 뭐 있노? 그냥 우째 되겠지~ 하고 지내지. 별일 없다."
"그기... 우리가 신경 쓴다 해가 뭐가 바뀔 것도 아이고 뭐~ 그냥 오늘은 느그 아부지하고 같이 아파트 경로당에서 작은 회식을 했는데 기분 좋게 한 잔 하시고 돌아오고 그랬지 뭐. 우리는 개안타~"
괜한 걱정이었나 싶어 피식 웃음이 났다.
"아부지 어머니 어디 가가지고 정치 이야기 괜히 하고 그러지 마이소."
"아이고~~ 그런 이야기 안 한다 인자. 느그 아부지도 예전처럼 안 그렇고 ㅎㅎ"
"사실 며칠 전에 전화드릴라 캤는데, 시국이 하도 어수선해가 괜히 그때 전화 드리면 뭔가 좀 애매할 것 같아서.." 변명 같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머니가 치고 들어오신다.
"ㅎㅎㅎㅎ 그래~ 내 눈치 딱 채고 있었지. 요거 하루 이틀 정도는 전화 안 하고 있겠구나 생각했다~"
"아!! 눈치채고 계셨제? ㅋㅋㅋ 그래가 내가 오늘쯤...은 전화해도 개안을 것 같아가 전화 드맀지~!"
"ㅎㅎㅎ 맞나? 그래 오늘 전화 타이밍 좋네. 암튼 걱정 말고 느그도 잘 지내제?"
"네~ 우리도 그냥 애들 학교 학원 잘 다니고 그러고 있지요~"
통화를 마치고 나니 기분이 한결 가벼워진다.
아버지가 51년생, 어머니가 53년생. 이제 75세를 향해 가시는 두 분에게서 예전 같은 정치적 날카로움보다는 삶을 관조하는 여유가 느껴진다.
어머니와, 또 그 너머 어렴풋이 느껴지는 아버지의 평온한 분위기가 참 다행스럽다.
두 분의 남은 여생은 복잡하고 심각한 생각들은 옆으로 스윽 밀어두고, 그저 편안하게 느끼는 하루하루로 채워지길 바랄 뿐이다.
장모님
잊을 만하면 동탄경찰서에서 반가운(?) 우편물이 날아오곤 한다. 처음 몇 번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이제는 익숙한 일상이 된 과속 위반 고지서다.
결혼 전 내 첫 차였던 포르테는 아이들이 크면서 SUV로 바꾸게 되었고, 마침 차가 필요하셨던 처가 어른들께 드려 지금은 안동에서 제2의 차생을 보내고 있다. 명의는 여전히 내 것으로 둔 채 말이다.
주로 장모님이 운전하시는데, 시골길 30km 제한 구역에서 40~50km 정도로 달리시다가 종종 찍히시곤 한다. 덕분에 내가 사는 동탄으로 친절하게 고지서가 배달되는데, 이번엔 좀 달랐다.
보통은 30km 도로 위반인데, 이번에는 80km 도로에서 100km로 달리셨단다.
'이 호쾌한 질주는 장모님이 아니라 장인어른 솜씨 같은데?' 아내와 킬킬거리며 김치 잘 받았다는 인사도 드릴 겸 장모님께 문자를 드렸다.
정권을 가리지 않고 과태료 납부로 국가 재정에 꾸준히 기여(?)해 오셨다며 아내와 농담을 하곤 했는데, 당사자 입으로 직접 '애국자'라 말씀하시다니... ㅋ
재미있는 건, 저 '애국자 집안'이라는 말이 단순한 드립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내의 집안은 무려 '백범 김구 선생'의 직계 후손 집안이다. 실제로 안동 처가에 가면 김구 선생의 글씨가 담긴 현판 액자를 볼 수 있기도 하다. 진본은 아닌 걸로 알고 있지만 말이다.
과태료 좀 냈다고 애국자라 하시는 그 뻔뻔함(?)이, 진짜 독립운동가 집안의 내력이라 생각하니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지난 비상계엄 소식에 안동 어른 두 분도 꽤나 안타까워하셨는데, 이렇게 소소한 유머로 넘길 수 있어 다행이다.
대구의 어머니든 안동의 장모님이든,
시국이 어지러워도 두 분의 삶은 평안하고 즐거우셨으면 좋겠다.
남은 날들도 유쾌하게, 흥하면서 살아가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