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행동에서 온다." — 달라이 라마
1. 나만의 설거지 플레이리스트: 발라드와 댄스 사이, 추억의 소환
나의 설거지는 고무장갑을 끼기 전, 또 하나의 중요한 의식과 함께 시작된다. 바로 식탁 한구석에 놓인 블루투스 스피커의 전원을 켜는 일이다. ‘띠링-’ 경쾌한 연결음과 함께 스마트폰과 스피커가 하나로 묶이면, 나는 그날의 기분과 설거지의 난이도에 따라 신중하게 선곡을 시작한다. 이것은 단순한 배경음악(BGM) 깔기가 아니다. 자칫 지루하고 고통스러울 수 있는 가사 노동의 현장을, 나만의 전용 콘서트장 혹은 90년대 감성 주점으로 바꾸는 마법의 주문이다.
금요일 밤이나 주말 저녁, 몸이 천근만근이고 “아, 진짜 하기 싫다”는 생각이 목구멍까지 차오를 때가 있다. 싱크대에는 기름진 삼겹살 불판과 라면 냄비들이 탑을 쌓고 나를 노려본다. 그런 날, 나는 주저 없이 ‘김건모’의 폴더를 연다. 전주만 들어도 어깨가 들썩이는 <잘못된 만남>이나 <핑계>의 비트가 부엌을 가득 채운다. “난 너를 믿었던 만큼 난 내 친구도 믿었기에~” 속사포 같은 랩이 터져 나오면, 수세미를 쥔 내 손은 더 이상 노동자의 손이 아니다. 나는 리듬에 맞춰 그릇을 닦고, 발로는 엇박자를 맞추며 스텝을 밟는다. ‘쏴아아’ 쏟아지는 물소리는 훌륭한 백색 소음 코러스가 되고, ‘달그락’ 그릇 부딪히는 소리는 현란한 퍼커션이 된다. 김건모 특유의 그 쫀득한 목소리에 맞춰 프라이팬을 닦다 보면, 지루했던 30분이 3분처럼 순식간에 지나간다.
반대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이나, 마음이 괜히 센티멘털해지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은 ‘발라드의 황제’들을 소환해야 한다. 나는 조용히 신승훈이나 김동률의 노래를 재생 목록에 올린다. 김동률의 <기억의 습작>이나 <취중진담>이 흘러나오면, 우리 집 좁은 부엌은 순식간에 분위기 있는 재즈바나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으로 변모한다. 김동률 특유의 그 묵직한 저음이 싱크대 스테인리스 통을 울리며 퍼질 때, 나는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와인잔을 아주 우아하게 돌려 닦는다. “그래, 나도 한때는 사랑에 목매던 청춘이었지.” 신승훈의 <보이지 않는 사랑>이 클라이맥스로 치달을 때면, 나도 모르게 “그리움에~” 하고 고음을 따라 부르다가 삑사리가 나기도 한다. 거실에 있던 아내가 “여보, 설거지해, 노래방 가지 말고”라고 핀잔을 주지만 상관없다. 이 시간만큼은 내가 비련의 주인공이다. 세제 거품은 무대 효과처럼 보이고, 흐르는 물줄기는 내 감성의 눈물 같다.
가끔은 윤종신의 노래가 사무치게 당길 때가 있다. 그의 노래 <오르막길>이나 <좋니> 같은 곡들은 가사가 마치 한 편의 수필 같다. 조금은 지질하고, 그래서 더 현실적이고 아픈 남자들의 이야기. 설거지하며 가사를 곱씹다 보면, 마치 친한 형이 옆에서 소주 한 잔 따라주며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하고 위로해주는 기분이 든다. 화려하지 않아서 더 마음에 와닿는 윤종신의 목소리는, 화려하지 않은 내 설거지 시간과 묘하게 잘 어울린다. 팥빙수를 먹고 싶다는 둥, 환생을 하고 싶다는 둥, 그의 수다스러운 노래들을 듣다 보면 입가에 피식 웃음이 번진다.
가끔은 팟캐스트나 오디오북을 듣기도 하지만, 역시 설거지의 최고 파트너는 ‘90년대 가요’다. 그 노래들은 나를 가장 빛나던 20대 시절로 데려간다. 취업 걱정, 결혼 걱정, 노후 걱정 없이 그저 사랑 노래 하나에 울고 웃던 그 시절. 설거지하는 동안 나는 잠시 ‘가장(家長)’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X세대 청년으로 돌아간다.
음악이 끝날 무렵, 설거지도 끝이 난다. 스피커를 끄면 다시 현실의 고요한 부엌으로 돌아오지만, 내 마음은 한결 가볍고 충만하다. 결국 ‘나만의 설거지 플레이리스트’는, 수동적인 노동을 능동적인 추억 여행으로 바꾸는 가장 확실한 장치다. 신승훈이 있고, 김건모가 있고, 김동률이 있는 한, 나의 싱크대는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무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