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시 중헌디
"현명해지는 기술은 무엇을 무시할지 아는 기술이다." — 윌리엄 제임스
1. 어떤 그릇부터 씻을까: 가장 기름진 것과 정면 승부하기
주말 저녁, 온 가족이 둘러앉아 거하게 삼겹살 파티를 끝낸 식탁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쌈장이 말라붙은 종지, 하얗게 기름이 굳어가는 불판, 김치 국물이 밴 앞접시, 그리고 아이들이 물과 음료수를 마신 깨끗한 유리컵들이 싱크대 개수대 안에 엉켜 있다. 기름 냄새와 음식물 냄새가 섞인 그 혼돈 앞에 서는 순간, 나는 고무장갑을 끼며 지휘자이자 전략가가 되어 첫 번째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도대체 무엇부터 손을 댈 것인가?’
설거지 학계(?)에는 크게 두 가지 학파가 존재한다. 물만 묻혀도 금세 깨끗해지는 유리컵이나 숟가락처럼 쉽고 간단한 것부터 해치우는 ‘안정 추구형’. 그리고 가장 닦기 힘들고 덩치가 큰, 보기만 해도 한숨이 나오는 기름진 프라이팬부터 덤벼드는 ‘정면 돌파형’.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오랫동안 철저한 ‘안정 추구형’이었다. 쉬운 것부터 시작하고픈 유혹은 꽤나 달콤하다. 깨끗한 유리컵 몇 개를 닦아 건조대에 올려놓으면, 금세 그릇 산의 높이가 낮아지는 것 같아 뿌듯한 기분이 든다. ‘오, 벌써 이만큼 했네? 별거 아니네.’ 일의 진척이 눈에 보이니 성취감도 빠르다. 그래서 나는 늘 만만한 컵과 숟가락, 종지부터 닦았다. 개수대 바닥에 깔린 거대한 기름 덩어리는 애써 외면한 채.
하지만 이것이 엄청난 패착(敗着)임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쉬운 그릇들을 닦으며 물을 트는 순간, 재앙은 시작된다. 개수대 바닥에 깔려 있던 프라이팬의 기름기가 뜨거운 물을 타고 둥둥 떠올라, 아직 닦지 않은 다른 깨끗한 그릇들까지 오염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컵을 닦던 수세미는 어느새 미끈거리는 기름 범벅이 되었고, 헹굼 물에는 붉은 고추기름이 둥둥 떠다녔다. 결국 나는 기름이 옮겨붙은 컵을 다시 세제로 닦아야 하는 이중고(二重苦)를 겪어야 했다. 편하게 가려다가 길을 두 번 돌아가는 꼴이었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속담은 부엌 싱크대에서도 유효했다.
인생의 일처리를 할 때도 나는 비슷했다. 출근해서 처리해야 할 업무 목록을 다이어리에 적어놓고, 나는 늘 쉽고 티가 나는 일부터 골라냈다. 아이들 출석부 정리, 책상 정리, 간단한 품의 기안 올리기... 이런 자잘한 일들을 처리하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그래, 나 오늘 아침부터 부지런히 일했어.”
정작 가장 중요하고 머리 아픈 일—학부모의 악성 민원 전화 응대, 복잡하고 까다로운 생활기록부 작성, 껄끄러운 관계의 동료와 풀어야 할 오해—은 목록의 맨 아래로 밀어두었다. “이건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니까, 점심 먹고 해야지. 아니, 5교시 끝나고 해야지.” 그렇게 핑계를 대며 퇴근 직전까지 미뤄두었다.
결과는 뻔했다. 미뤄둔 ‘기름진 문제’들은 시간이 갈수록 식어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마감 시간이 닥쳐오면 허둥지둥 처리하느라 실수가 생겼고, 그 불안감(기름기)은 내가 처리한 다른 사소한 일들의 성취감까지 찜찜하게 오염시켰다. 하루 종일 마음 한구석이 돌덩이를 얹은 듯 무거웠던 이유는, 내가 그 일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일을 ‘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강력한 화력과 깨끗한 무기가 필요한 최종 보스(Boss)를, 나는 가장 지치고 무기도 낡은 상태에서, 퇴근 10분 전에 마주하곤 했다. 승산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싱크대 앞에서 전략을 바꿨다. 가장 기름지고, 가장 닦기 싫고, 가장 못생긴 놈부터 먼저 집어 든다. 수세미가 가장 깨끗할 때, 물이 가장 뜨거울 때, 그리고 내 팔에 힘이 가장 많이 남아있을 때, 그 삼겹살 불판과 정면으로 마주한다.
물론 과정은 힘들다. 세제를 듬뿍 묻혀 박박 문질러야 하고, 미끈거리는 느낌을 온 손으로 견뎌야 한다. 팔이 아프고 땀이 난다. 하지만 이 가장 큰 고비를 넘기고 나면,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다. 거대한 불판이 사라진 싱크대는 갑자기 넓어 보인다. 남은 밥그릇이나 컵들은 거짓말처럼 쉽게, 콧노래가 나올 정도로 수월하게 닦이는 것이다. “가장 큰 놈을 해치웠다.” 그 안도감이 남은 설거지를 노동이 아닌 놀이처럼 만들어준다.
나는 매일 밤 싱크대 앞에서 인생의 우선순위를 다시 세운다.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고, 가장 부담스러운 ‘기름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뒤로 숨겨두면, 그 문제에서 나온 걱정이라는 기름때가 우리 삶 전체를, 심지어 우리의 휴식 시간까지 오염시킨다.
오늘도 나는 가장 더러운 그릇을 제일 먼저 집어 든다. 이것은 단순히 설거지를 빨리 끝내기 위한 요령이 아니다. 내 인생의 가장 어려운 문제들을 회피하지 않고, 눈을 똑바로 뜨고 정면으로 돌파하겠다는, 나 자신과의 용기 있는 약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