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비행의 첫 기착지는 앵커리지.
자연의 도시다.
밖은 아직 어슴프레.
해가 완전히 뜨기 전이다.
하지만 오전 일찍부터 비예보가 있어 서둘러 나섰다.
어김없이 사나운 추위가 빈틈을 찾아들지만,
이내 몸의 열기로 녹아내린다.
오늘의 러닝 코스는 캠벨 크릭(Cambell Creek)이라고 하는 작은 시냇가 옆 오솔길이다.
보통 겨울에는 눈이 듬뿍 쌓여
접근조차 힘든 곳이지만
이제 슬슬 봄이 오고 사람들의 왕래가 시작되며
자연스레 다시 길이 드러났다.
이른 아침 안갯속의 크릭은 고요하다.
이어폰을 빼고 주변의 소리를 듣는다.
자연 속에 있음을 느끼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 적막함 속에 혼자 있다는 두려움.
얼었던 물이 조금씩 흐르기 시작하고
그 주변의 빽빽한 나무들이 눈에 들어온다.
매우 어둡다.
뭔가 나를 바라보고 있을 것만 같은 또 한 번의 두려움.
차마 주변으로 고개를 돌려 초점을 맞출 수가 없다.
그대로 앞만 보고 뛰는데,
작은 움직임이 느껴진다.
느끼고 싶지 않은,
보고 싶지 않은 숲 속의 움직임.
내 발걸음은 늦어졌고,
이내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았다.
바로 앞에서 흐릿하지만 확실한 움직임.
무스다.
TV에서 볼 때는 그냥 온순한 소 한 마리였지만,
바로 코앞에서 느끼는 무스는 달랐다.
내 몸뚱이만 한 머리만 빼꼼히 나와있고,
그 거대한 머리를 지탱하고 있는 몸은
숲 속에 가려져 있었다.
모든 것을 내보이고 있지 않지만
덩그러니 드러난 무스의 머리는 “공포”였다.
무스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 빛.
야생동물을 만나면
절대 등을 보이고 달아나지 말라고 몇 번을 배웠지만
내 머릿속은 하얘졌고,
그대로 돌아서 내 몸의 모든 능력을 쏟아내 달렸다.
손목에 있는 애플워치에서는
고심박수 알림이 계속 울렸다.
그렇게 내달려 캠벨 크릭(Cambell Creek)을 도망 나왔다.
호텔에 돌아와 진정되지 않은 가슴을 붙들고
잠시 쉬다, 사람들이 많은 상점에 들렀다.
가벼운 마음으로 인파들 속에 섞여
안전함을 느끼려 들어갔건만,
입구에서 파는 것은 “곰 스프레이”.
야생동물의 시즌이 돌아온 것이다.
그들의 시간.
곰을 만나지 않은 것이 다행인가?
순식간에
팔에 있는 얼마 되지도 않는 솜털이 곤두섰다.
두 번째 레이오버는 뉴욕.
미국의 심장부이고,
여러 번의 테러 위협과 실제 사건이 있었던지라
오히려 치안도 좋고 안전하다.
앵커리지의 무스와의 기억을 잊으려
이번엔 뉴욕 센트럴파크 러닝을 계획했다.
새벽에 러닝 하는 사람도 많고
센트럴파크 러닝코스에서 맞이하는 일출이
너무 근사할 것 같아 다시 장비를 갖추고 길을 나섰다.
뉴욕엔 무스도 곰도 없으니까.
처음엔 웜업을 위해
간단히 스트레칭하며 걷기 시작했다.
호텔을 나서서 10분쯤 지났나?
저 멀리 두 블록쯤 더 되는 곳에 움직임이 보였다.
아침 일찍 러닝 하는 사람이라기엔
뭔가 잔뜩 입고 있다.
이젠 한 블록.
좀 더 자세히 보인다.
잔뜩 입고, 뭔가 잔뜩 갖고 있고,
그마저 남은 짐은 카트에 잔뜩 실려있다.
노숙자들이다.
노숙자들이 그렇게 활발히 움직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낮에는 대부분 건물 한구석 그늘진 곳에
짐을 모아두고 약에 취해서인지,
술에 취해서인지 웅크려 움직이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대부분의 노숙자들은 그랬다.
그러나 해뜨기 전의 노숙자들은 달랐다.
생기가 돌고 활발히 움직이며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순간 나를 느낀 듯 빠른 움직임을 멈추고
쓱 고개를 돌린다.
붉은 조명 아래,
그보다 더 밝게 빛나는 여러 개의 눈빛.
그 사이를 뚫고 갈 수는 없었다.
“공포”다.
도로를 건너 멀찍이 떨어져서 그 구역을 벗어났다.
아직 웜업이 끝나지 않았지만
나는 뛰고 있었고,
애플워치에서는 또 고심박수 알림이 계속되었다.
봄이 오는 앵커리지, 안개 낀 새벽의 아침.
붉은 조명 불빛 아래, 모두가 잠든 비어있는 뉴욕 거리.
나를 위한 시간과 장소라 생각했건만.
그곳에서 느낀 “공포”는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침입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