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을 아쉬워하지 마라, 그것은 또 다른 출발점이다
시험이 끝났다
시험의 결과가 어떠한지 간에 상관없이 시험이 "끝났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흔한 고등학생인 나는 언제나 시험 기간이 시작되기 전 생각한다. '시험 끝나면 뭐하지?' 사실 이는 나만의 고민이 아니다. 주변에 있는 내 친구들 중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시험이 끝나고 할 일에 대한 간단한 고찰(?)을 한다. 시험 끝난 날의 점심메뉴를 고민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하여 주말을 알차게 놀 수 있는 마스터플랜을 짜기도 하고, 학습계획보다 구체적인 휴가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언젠가 국어 교과서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은 지문이 나온 적이 있다.
"수술 뒤에는 약속을 잡지 마라. 수술 뒤에 있을 약속을 기다리느라 마음이 들떠 당장 눈 앞에 있는 수술을 망치게 된다. 미래의 일에 마음을 빼앗겨 눈 앞의 중요한 일들을 망치지 마라."
이 지문을 공부할 때에는 작가의 의견에 격하게 동조하며 주어진 현실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확실히 중학교에서의 시험공부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 고등학교의 그것이다. 지식적으로 더욱 깊어진 내용을 다룰 뿐만 아니라 글자 하나하나가 미래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무게가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평가에 대한 부담감이 알게 모르게 늘어난 탓에 시험을 준비하며 받는 스트레스가 더욱 크게 다가온다. 그 스트레스를 잠깐이라도 잊어보고자 시험이 끝나고 나만의 시간을 보낼 생각을 한다. 효과는 상당하다. '그래 이렇게 쉬고 놀려면, 일단 시험부터 빨리 보자!'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다시 공부할 힘이 생겨난다.
어, 이제 뭐하지?
그렇게 행복한 상상을 하며 버텨온 시간이 무색하게 막상 시험이 끝나면 일종의 아노미 상태에 빠진다.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사회학의 종주(宗主)라고 불리는 다비드 에밀 뒤르켐(David Émile Durkheim, 이하 뒤르켐)은 사회가 급격히 변동할 때에 그에 따른 사회의 지배적·보편적 규범이 존재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혼란을 겪게되는 '아노미'현상이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마치 뒤르켐이 말했던 것처럼, 시험을 준비해야한다는 일종의 규범 속에 2-3주 동안 살아왔던 나는 갑자기 '시험이 끝났으니 짧은 자유를 누리라'는 갑작스러운 선언에 당황하며 뭘 해야할지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졌다. 이때 시험 전 세워두었던 간단한 계획들은 사라진지 오래다.
매번 시험이 끝나면 뭘 해야할지 몰라 방황한다. 일단 노트북부터 켜보고, 잠시 인터넷을 뒤적거리다 금방 흥미를 잃어 핸드폰을 열어 인스타그램을 본다. 시험이 끝났다고 환호하는, 그리고 실행력 좋게 벌써부터 놀이공원에 가서 사진을 찍어 올리는 친구들의 스토리와 게시물을 보면서 일종의 경외심을 느끼다 스르륵 잠에 든다. 오랜만에 맞는 마음편한 수면은 곧 숙면으로 이어진다. 나도 모르는 새에 해가 뉘엿뉘엿해질 때까지 자고 일어나면 부스스한 몸을 일으켜 게임을 켠다. 굳이 재미있지 않더라도 게임이라도 하지 않으면 시험을 무사히(성적을 제외하면) 끝낸 내 자신에게 보상해주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 의무적으로 몇 판의 게임을 돌린 후 다시 깊은 고민에 빠진다. '아 이게 맞나...' 대개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것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 그닥 바람직하지 않다는 방증이다. 정신을 추스르고 의자에 기대어 앉아 따뜻한 커피와 함께 책상에 꽂혀있는 얇은 소설을 뒤적거리다 다시금 잠에 빠진다. 그렇게 나의 '시험 후 아노미'는 잠을 자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새로운 시작
대개 첫 날의 아노미를 부족한 잠을 채우는 것으로 넘겼다면, 두 번째 날은 나만의 시험 후 규범을 새로이 확립하며 아노미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사실 나의 MBTI는 ENFP로 주로 나오고, 나 또한 나를 말할 때 ENFP로 설명한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의 모습, 즉 '타자화된 자아'라고 볼 수 있다. 오롯이 나 자신을 대할 때의 나의 모습은 그와는 정반대의 모습이 나타난다. 시험이 끝나면 고생한 나 자신을 다독이기 위해 나만의 시간을 갖는다. 잠시 모든 핸드폰의 알림을 끄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거나 평소에는 시간이 없어 가보지 못했던 유적지나 박물관에 가서 새로운 것을 알아본다. 이번에는 백신을 맞고 난 후 아프지 않을거라는 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국립중앙박물관을 예약했다. 이미 기억이 흐릿해져버릴 정도로 오래 전에 가봤지만, 그 내부의 전시품과 내용에 대해서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기에 처음 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 동안 쌓아온 나의 지식을 확인하고 한 단계 높일 수 있다는 생각에 더욱 기대가 된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서점에 들러 책을 샀다. 서점에 들르는 것을 좋아한다. 모든 서점은 나름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대형 서점은 깔끔하고 세련된 맛에 들어가보고 동네 서점은 그만의 포근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뽐내고 있으며, 헌 책방은 특유의 책 냄새와 함께 요새는 쉬이 느낄 수 없는 아날로그의 향취를 느낄 수 있다. 서점 나름의 분위기에 빠져 한동안 책을 읽고 마음에 드는 책을 몇 권이고 골라 나오며 일말의 행복감을 느낀다. 이번에는 소위 '문과생'이라는 타이틀에 맞게 문학을 몇 권 집어들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작부터 시인이 쓴 산문집까지 책을 한 아름 들고 나오며 약간의 희열을 느낀다. 언제쯤 이 책들을 다 읽게될 지는 모르겠지만, 사둔 책은 읽지 않는 법이 없으니 언젠가는 모두 읽고야 말 것이다.
그렇게 나의 '시험 후 아노미'를 해결할 새로운 규범을 세우며, 침대에 누워 따뜻한 차, 잔잔한 음악과 함께 서걱거리는 책장의 새로운 시작을 넘긴다.
2021. 10. 30. 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