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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요일 Sep 26. 2022

실탄 일곱 발과 백 루블, 인간 안응칠

소설 <하얼빈> 북리뷰

최근 회자되고 있는 책, <하얼빈>. 지인이 고맙게도 이 책을 선물해주었다. 익히 알고 있는 안중근의 이야기였지만, 완벽한 영웅의 모습보다는 인간 안응칠의 담대했던 일주일의 행적을 담담히 적은 책이었다. 우리에겐 운명의 적인 '이토 히로부미'를 묘사함에 있어도 그의 악행을 전면에 드러내고 실랄히 까발리기보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보고하듯 써내려가고 있다.   아마도 굴곡진 역사 속에 담긴 인간 이토, 안응칠, 우덕순 이야기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한국 청년 안중근은
그 시대 전체의 대세를 이루었던
세계사적 규모의 폭력과 야만성에 홀로 맞서 있었다.
(303쪽)


가장 흔한 이야기를 가장 탁월하게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김훈의 문체는 짧고 담백했다. 작가의 심리적 개입이나 평가는 거의 없었고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보여주는 글쓰기로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 있었다. 객관적인 관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함으로써 우리 민족만이 공감할 수 있는 편파적인 감성팔이를 경계하고 있는 듯했으며 그로 인해 누구나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당위성을 확보한 듯했다. 


누구나 아는 '안중근'이야기지만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전개를 통한 신선함이 다. 쉽고 단단하게 이야기의 흐름을 유지하되 후반부로 갈수록 안중근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더 깊숙이 들여다보고 싶게 만드는 몰입의 구조를 촘촘하게 만들었. 이런 점이 김훈이 대단한 작가라고 칭송하는 이유가 아닐까. 위인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웅의 비범한 출생, 특별한 재능, 우월한 행동 등의 장황한 설명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는 누구나 알고 있는 이순신 이야기를 한산대첩 하나로 집중해서 조명하고 절제하여 영상으로 담아낸 최근 영화 <한산>이 떠오르는 대목이었다. 그만큼 선이 굵고 군더더기가 없는 책이었다. 딱 필요한 만큼만 말하고 최소한의 소설적 장치만을 일관성 있게 유지하며 인간 안응칠이 독립투사 안중근으완성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서술해내는 탁월함이란.


나는 이 세 단어(포수, 무직, 담배팔이)가 다른 말들을 흔들어 깨우고 거느려서 대하를 이루는 흐름을 소설의 주선율로 삼고, 그 시대의 세계사적 폭력과 침탈을 배경음으로 깔고, 서사 구조는 역사적 사건의 전개에 따르되, 이야기를 강도 높게 압축해서 긴장의 스파크를 일으키자는 기본설계를 가지고 있었다.
(작가의 말, 304쪽)



말하지 않아도 아는 그 무거운 사명.


인간 안응칠은 그가 이토를 죽이기 전까지 그의 모든 명분에 대한 설명을 아꼈다. 그의 형제와 아내(김아려), 어머니에게 조차그의 비범한 행적에 대한 이유를 고하지 않았다. 물론 그의 가문에서 이어져 오던 가풍과 국가가 모든 권력을 잃은 무기력한 시대적 상황에 따른 공감대가 무언의 신뢰로 이어져 그에게 아주 큰 명분을 주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 명분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만큼 당연한 것이었고 그 엄중한 울림이 안응칠의 가슴에 꽂혔을 것이다. 그 부름이 그의 몸을 뜨겁게 달구어 선명한 노선으로 하얼빈에 직진하게 만든것이 아닐까. 목숨을 건 그의 준엄한 사명 앞에 누구도 섣불리 가타부타 시비를 걸지 못했고 이심전심으로 방법은 달랐지만 모두가 독립투사되, 모두가 의병이 되어 힘을 보탰다. 먹을 것도 없고 행색도 남루했지만  조국을 잃은 절박함에 차갑게 각성된 야성과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소명의식은 그 어떤 때보다 빛났던 그때.

 

밤이 늦으면 사내들은 촛불 빛 속에서 거뭇거뭇했다. 김아려는 이 사내들과 자신의 운명이 시국이라는 거수의 발자국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중략)
사내들의 말은 가깝고 다급했지만, 말 끝난 자리의 허허로움을 다들 알고 있었다. 안중근은 몸속에서 들끓는 말을 느꼈다. 말은 취기와 뒤섞여 아우성쳤다. 안중근은 말하지 않고 술을 마셨다. (59쪽)


꼭 필요한 것만 준비하고 목표에 집중한다.

 

김성백에게 얻은 100 루블, 실탄 7발이 든 권총 하나. 그가 이토를 처단하기 위해 준비한 전부다. 자신의 목숨은 물론 가족의 운명까지도 건 이 엄청난 일에 그가 준비한 것은 별로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머릿속에는 '이토를 없애야 한다'라는 큰 목적만 있을 뿐 다른 어떤 걱정도 계획도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그의 막내아들의 얼굴을 본 적도 없다. 그가 완벽한 영웅이기에 이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단 한 가지 임무에만 몰두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복잡한 준비와 많은 사람들의 동의와 철두철미한 계획을 하려 했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동안 어떻게 살았나?혹시 필요치 않은 준비와 걱정을 하느라 정작 중요한 것들을 많이 놓치며 살진 않았나 문득 깊은 생각에 잠겨본다.


가슴 떨리는 큰 일을 준비하는 자의 비장함에는 범접할 수 없는 긴장감과 고도의 집중력이 존재한다. 안중근도 그랬다. 주변 사람까지 압도하는 엄청난 에너지가 뿜어져 나와 승복하게 만들었다. 무모해 보이는 그의 계획에 누구 하나 반대하는 자가 없었고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자도 없었다. 그 자신을 위해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같은 민족이라면 누구라도 그에게 길을 열어주고 자금을 보태주었다. 그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위대한 역사적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그는 한치의 흩트러짐도 없이 나아간다. 이토를 조준하고 명중하는 그 순간까지.


이토의 목숨을 죽여서 없앤다기보다는, 이토가 살아서 이 세상을 휘젓고 돌아다니지 않도록 이토의 존재를 소거하는 것이 자신의 마음이 가리키는 바라고 안중근은 생각했다.
(89쪽)

감히 말할 수 없는 뜨겁고 묵직한 그것.

 

다 읽고 며칠간 벅차오르는 감정에 글을 쓰지 못했다. 그 어떤 말도 적합해 보이지 않았고 그 어떤 감상도 오만해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작가 김훈도 건조한 문체로 말을 아끼고 골라서 썼겠다 짐작해본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숙연해지는 역사의 순간이었다. 말없이 가슴이 뜨거워지는 묵직한 힘에 밀려 몇 날 며칠을 책을 읽고 또 읽고 뒤적이며 곱씹었다.


나의 30대는 어땠을까.
나라면 나라를 위해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선뜻 손을 내밀수 있었을까.
내 곁에 안중근이 있었다면 뭐라고 했을까.


평화롭게 공원에 앉아 책을 읽고 보는 이 단순한 행위조차도 그 시절 물불 가리지 않고 나라를 위해 싸워준 젊은 청춘들이 없었다면 가능한 일이다. 별 볼일 없는 빈약한 글로 그들을 감상하고 평한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나는 지금 이 태평한 시대에 살면서 마음대로 숨 쉬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던 암흑의 시대를 잠시 지켜본다는 것이 얼마나 미안하고 또 감사한 일인가. 별 것 아니지만 이렇게 소박한 후기로 나마 그들의 또렸했던 정신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소망을 담아내 본다.

짧고 선명한 그들의 신뢰와 목적, 230~2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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