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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요일 Oct 29. 2022

공부가 재밌다고요?!

<최재천의 공부> vs. 나의 공부

친한 동료들과 하는 독서모임 <달밤의 인문학 산책(이하 "달밤 산책")>은 지난해 친한 샘의 권유로 시작하게 되어 해를 거듭할수록 "독서"라는 것에 찐 재미를 느끼게 하는 고품격 취미생활로 자리 잡게 되었다. 10월 같이 읽은 책은 <최재천의 공부>였다.

책을 읽고 말하는 게 뭐가 재밌나고요?

심플한 운영, 달콤한 잿밥

10명 남짓되는 회원들이 각자 추천도서를 정하고 자신이 추천한 책의 발제를 일 년에  한 번씩 돌아가며 맡는다. 누구나 한 번씩 이 일을 하기에 누구 한 명이 과도한 책임감을 갖는다거나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운영상의 최소한의 직책, 총무와 회장을 선출하고 나머지는 모두 비슷한 양의 임무를 맡는다. 그나마 회장과 총무도 일 년에 한 번씩 돌아가며 맡으니 완전한 민주공동체.


회비는 매달 2만 원, 모임 날 칼같이 입금하고 같이 모여 그간 먹고 싶었던 음식을 찾아 장소를 정한다. 이것도 발제자가 담당. 메뉴는 계절과 책의 소재에 따라 마구잡이로 정한다. 심각한 고민과 눈이 빠질 듯한 검색은 노노. 느낌 가는 데로 프리 하게. 싸늘한 가을날엔 뜨끈한 만둣국, 상큼한 봄이 오면 제철음식 도다리 쑥국, <노인과 바다>를 읽고는 청새치를 닮은 듯한 장어구이, <물고기는 없다>를 읽고는 물고기가 없는 불고기 백반으로.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는 호밀빵을 먹는 재미를 느끼며 책 읽기의 잿밥을 즐겼다.  


Patricia Polacco의 <Thank you, Mr. Falker>의 첫 장면을 보면 5살을 갓 넘은 손녀가 처음 책을 접할 때, 책 위에 달달한 꿀을 얹어주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나온다.

온라인 서점 알라딘 자료 캡쳐
할아버지:  맛보렴.
손녀: 달콤해요.
할아버지: 지식도 마찬가지란다.
벌이 꿀을 찾아다니는 것처럼 너도 책의 페이지를 찾아 따라가 보면 달콤한 지식을 모을 수 있을 거다.


손으로 책위의 꿀을 찍어 맛보는 순수한 소녀의 모습과 처음 접하는 책이 달콤한 꿀 맛으로 연상되길 바라는 할아버지의 세심한 마음씀이 돋보이는 대목이었다. 책 읽는 즐거움달콤한 꿀맛으로 소녀의 머릿속에 남아 평생 책 읽고 지식을 쌓는 일이 즐겁고 행복한 일임을 감각적으로 체득하게 된다면 이보다 좋은 교육이 어디 있을까. 


<달밤 산책>도 마찬가지다. 일에 지치고 사람에 치이고 편히 쉬고 싶은 충동을 이겨, 퇴근 후에 사람들이 모여 독서모임과 즐거운 식사 한 끼를 나눈다는 것은 "독서+식사의 즐거움"으로 유쾌한 이벤트가 된 것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매달 참석률은 거의 70% 이상이다. 물론 결석자에게 회비를 환불해주지 않는다는 철통 규칙이 한몫을 하기도 했지만~^^

알면 사랑한다. And 알면 즐겁다.
우리 인간은 사실을 많이 알면 알수록 결국엔 이해하고 사랑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고, 결국 내가 사는 세상은 내 마음이 뻗어가는 관계 안이기에 "알면 사랑한다"라는 말이 깊이 다가옵니다.
(최재천의 공부, p. 39)


독서모임에서 내가 고른 책은 <노인과 바다>였다. 위대한 고전이고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는 책이지만 책장을 펼치면 1~2페이지를 못 넘기고 잠들거나 딴짓을 하기 일쑤였다. 누군가 그랬다. "혼자는 못하지만, 같이 하면 할 수 있다"고. 고전이 딱 그렇다. 혼자는 못 읽지만, 같이 읽으면 훨씬 재밌고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노인과 바다>의 노인은 홀로 망망대해에 나가 사투를 벌인다. 독백하듯 혼자 중얼거리는 모든 말이 책의 주요한 내용이다. 막상 책을 다 읽고 나니 그 지루한 청새치 잡이의 여정이 인생과 똑 닮아있음을 깨달아버렸다. 열심히 찾아 나선 그 어떤 목표나 성취가 집요하게 달라붙은 상어 같은 고난으로 없어지거나 좌절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진짜 알맹이는 그 이후이다. 빈털터리로 큰 청새치의 뼈만 잡아 돌아온 노인은 전혀 낙담하지 않는다. 또 묵묵히 집에 돌아와 일상을 보낼 뿐.

완독을 통해 <노인과 바다>를 알게 되니 노인의 삶이 참으로 사랑받아 마땅함을 알게 되었고, 시시콜콜 묘사된 물고기에 관심을 갖게 되고 바람, 햇볕, 바다를 통한 자연의 섭리에 고개 숙여지며 바다에 홀로 남겨진 노인의 외로움과 고독, 소년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절절히 느끼며 즐거움을 얻었다. 실로 알면 사랑하게 되고 또 즐길 수 있지 않은가.

교사는 필요 없다. vs. 학위도 필요 없다.

<최재천의 공부>에서 저자 최재천은 아이들이 서로 가르치고 배우고 윗반이 아래반을 이끌도와주고 그룹으로 서로 보고 배우는 현장을 보며 '교사는 필요 없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장면에서는 교사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교사가 가이드나 퍼실리 에이터의 역할로 전환될 뿐이다. 특히나 중고등학교에서는 더욱 그렇다. 실제로 교실에서 모둠활동을 하는 것은 수업장면에서만 교사가 필요 없을 뿐, 모둠을 구성하고 수업의 단계를 조직하고 무엇을 그룹 내에서 토론하게 하느냐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준비가 교사의 몫으로 오롯이 남겨져 있다.


내가 겪은 교사가 온전히 필요치 않은 이상적인 교실은 대학원이었다. 교수는 큰 주제와 교재를 제시하고 그것을 수업시간에 맞게 조를 나누고 발표를 준비하는 대부분의 과정은 학생들이 했다. 여기서 교수의 역할은 교사가 아니라 '방향 제시자, 좋은 질문을 하는 자'로서의 역할이 가장 컸다. 물론 그 마저도 하지 않는 교수가 종종 있긴 했지만.


교수가 없는 혹은 최소한의 역할로 축소된 대학교 강의실은 실로 즐거웠다. 연속 3시간이나 되는 강의시간이 길고 지루할 법도 하지만 꼼꼼하고 잘 정리된 발표를 들은 뒤 질의응답하고 토론하는 그 시간이 나는 참으로 좋고 재밌었다. 하나의 문제에 깊이 빠져 전문가이자 동료인 선생님들과 깊이 고민하고 다양한 의견을 내는 그 과정은 지적인 즐거움을 최고치로 끌어올리는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지도교수의 성향과 이론을 따르며 뼈를 깎는 노력과 노동으로 억지로 만들어가는 논문 작성에 흥미를 잃게 되었다. 이로 인해 아쉽게도 야심찬 나의 박사과정은 졸업이 아닌 수료로 마감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 시절 순수했던 지적 희열과 기쁨을 통해 얻은 게 하나도 없는 건 아니었다. 그때였던 것 같다. 가르치는 교사 없이 기본적인 자질이나 태도가 겸비된 구성원이 모인 지적인 공동체라면 굳이 대학원이라는 교육체제를 빌리지 않아도 충분히 서로에게 영감과 배움을 줄 수 있는 그 무엇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 그런 깨달음을 즉시 실천에 옮겼다. 여러 가지 독서동아리를 직접 기획하고 사람들을 모으고 만들어나갔다. 앞서 말한 <달밤 산책>을 포함한 10여 개의 독서동아리가 다양한 계층, 직업, 나이에 따라 구성하고 운영했다. 이런 모임은 각각의 특성에 따라 나에게 다른 영향과 깨달음을 주며 지금까지도 내 삶의 교과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저녁 4시간의 자유 vs. 새벽 4시부터의 자유

교수 최재천은 아이를 픽업하고 돌보는 육아활동에 적극 참여했고 그로 인해 한국의 고질적인 저녁 회의/회식문화도 점심 회의/회식 문화로 바꾸어 나갔다. 이로써 그는 퇴근 후, 온전히 자기만의 시간을 4시간이나 얻어낼 수 있었다. 이 시간 동안 그는 책을 쓰고 연구를 하고 강의를 준비하며 자기 계발의 시간을 알차게 사용했다. 그리고 그는 7시간을 잤다.


그러나 맞벌이 부부, 혹은 아내는 다르다. 퇴근 후 시간은 또 다른 일터의 시작이다. 퇴근하고 집 문을 열고 가방은 던져놓고 곧장 부엌으로 직행. 옷도 못 갈아입고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후다닥 아이들과 저녁을 먹고 씻기고 내일 숙제와 준비물을 준비하고 나면 저녁 9시, 아이들을 재울 시간이다. 미국 드라마에서는 그냥 "Good night~!"하고 뽀뽀하고 나오면 끝이더만 한국은 아니 우리 집은 사정이 다르다. 잠들기 전에 아이와의 교감의 시간이 중요하다고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가지고 아이 곁에 누워 아이가 잠들 때까지 책을 읽어주거나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노래를 불러준다. 아이가 일찍 자면 나도 하고 싶은 일해야지 다짐하지만 아이보다 내가 먼저 잠드는 날이 허다하다. 이렇게 나만의 저녁시간은 필요한 가족과의 일상으로 스르르 녹아 사라진다.


일부 정신 바짝 차린 엄마들은 아이들을 재우고 소위 "육퇴(육아 퇴근)" 시간을 즐기기도 하지만 일단 감긴 눈이 다시 떠지긴 좀처럼 쉽지 않다. 나만의 시간을 찾고 싶다면 잠자는 시간을 쪼개 따로 만드는 방법밖에 없었다. 새벽 4시, 잠자는 아이가 깨지 않게  졸린 눈을 비비며 혼자만의 시간을 쟁취하듯 야무지게 찾아낸다. 이 시간에 대학원 공부를 하고 수업 준비를 하고 시험문제를 내기도 한다. 잠자는 시간과 맞바꾼 고작 2시간만이 내게 허락되었뿐이다. 더 많은 시간을 원한다면 더 빨리일어나는 수밖에 없다. 6시부터는 여지없이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내 출근 준비, 아이들 등교 준비를 해야 했으므로.


독서는 일입니다. vs. 독서는 산책입니다.

작가 최재천은 독서를 빡쎄게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요즘 처럼 말랑말랑한 책들만 팔리는 세태를 꼬집어 말한 것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독서량이 늘어날수록 완전 새로운 분야의 책을 접할 때, 전보다 덜 힘들어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거예요.


이는 학자로써의 그의 부단한 연구의지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허나 세상 사람들이 책을 읽는 이유는 다양하다. 독서를 커다란 미션처럼 완벽하게 끝까지 해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말랑말랑한 책이 많이 팔린다는 것은 세상이 그리 말랑말랑하지 않음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과도한 경쟁과 팍팍한 성과주의 문화에 매몰된 평범한 직장인이 빡쎄게 책을 읽을 열정이 남아있을까. 그전에 빡쎄게 자기계발을 할 시간과 여유를 사회에서 허락해주는 것이 먼저가 아닌지.


책이 누군가에는 일이 되고, 누군가에는 힐링이 되고 누군가에는 즐거움이 되고, 누군가에는 노여움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탐색할 대상이 되는 가까운 친구가 되었으면 한다. 요즘은 책보다 휴대폰을 통해 이 모든 것을 하는 사람이 많은데 책을 일처럼 하라고 한다면 읽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 어떤 목적이든 다양한 용도와 목적으로 유유자적하게 힘을 빼고 휴대폰을 보듯, 산책을 하듯 쉽고 편하게 책을 보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나는 꿈꾼다. 일을 해도 노래를 흥얼거릴 수 있는 그런 여유있는 사회가 된다면 독서라는 것은 이미 일 그 자체를 넘어 하나의 생활로 와 있을 것이다. 밥먹고 답답하면 집앞으로 산책을 가는 것 처럼 말이다.


공부는 재밌다.

함께 하는 공부는 더 재밌고. 멈추고 혼자 조용히 생각하는 시간은 창의력으로 가는 다리를 연결해준다고 그는 말했다. 다만, 그 재미를 느낄 시간과 여유가 필요할 뿐.  속의 다양한 맛, 달고 쓰고 신 맛을 느끼고 씹고 소화할 시간이 준다면 어떨까. 그런 시간이 모두에게 공평히 주어진다면 5살, 처음으로 책을 접했던 소녀처럼 할아버지가 꿀을 얹어주었던 달달한 책의 맛을 기억해내고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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