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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요일 Dec 06. 2022

새 시대, 새 어른으로 순례씨를 추천합니다.

중년의 롤모델 : <순례 주택> 북리뷰

 11월 독서모임의 책은 <순례 주택>이었다. 제목만 보고 순례 여행하면서 본 주택들을 소개한 책인가 상상하며 첫 장을 펼쳤다. 그러나 틀렸다. 순례씨가 주인인 주택 이름이 '순례 주택'이었던 것이었다. 책 내용이 어렵지 않고 최근 유행하는 도시인의 외로움과 힐링을 주제로 쓴 책처럼 보였다. 나에겐 <불편한 편의점>,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와 를 같이 하는 따뜻한 책이었다. 생활지수가 무척 높은 '오수림'이라는 순례씨의 최측근도 아주 매력적인 인물이지만 나는 단연코 주인공 '순례'씨를 추앙하게 되었다. 특히나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어른의 모습으로 손색없다. 여러 가지 이유로 나는 이 시대의 좋은 어른상으로 '순례씨'를 추천한다.


먼저 작업 걸 수 있는 용기 : 여자라는 편견에서 탈피


할아버지는 거북 마을에서
오랫동안 전파사를 했다.
순례씨는 성실하고 수줍은
 전파사 주인이 마음에 들었다.
홀아비라는 걸 알고 작업을 걸었다.
둘은 이십 년을 함께 했다.
내가 아는 최장수 연애 커플이다.

순례씨는 여자라고 다소곳이 남자들의 선택을 기다리거나 남편과 사별한 여인이라고 슬픔에 잠겨있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자신의 욕구와 필요에 정면으로 다가가고 승부수를 던졌다. 그리고 멋지게 골인한다. 연애사업에서도 그녀의 사업 수완은 멋지게 빛났다. 남들이 정략 연애라고 비웃고 자식들은 재산을 보고 접근한 것이라고 수군거려도 당당했다. 결혼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연애라는 자유로움을 선택했으므로 그녀는 어떤 비난에도 당차게 대처할 수 있었다.


단일 메뉴로 장수하는 살림왕 : 살림 강박에서 해방


그녀의 최측근 수림이는 남자 친구 전파사 할아버지의 손녀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할아버지가 손녀를 키우게 되자 그녀의 여자 친구인 순례 씨는 아주 쿨하게 수림을 거둔다. 그런데 그녀의 사랑법은 기존의 할머니들과 사뭇 다르다. 뭐든 좋은 걸로 정성 들여 먹이는 것이 가장 좋은 육아비법이라고 알고 있는 세상의 편견을 뒤집을 명품 단일 메뉴를 선보인다. 그것은 이름하여 '해녀밥'.


순례 씨는 십 분 내로 할 수 있는
요리를 좋아한다.
육수를 내는 건 본 적이 없다.
겨울엔 된장을 물에 풀어서
미역을 넣고 끓인다.
(중략) 달걀은 언제나 프라이, 두부도 잘라서 구우면 끝이다.
나물 반찬은 아예 안 한다.
노동력을 착취하는 음식이라고 주장하며.
 설거지는 적게, 시간은 빨리.
이게 모토니까.
(32쪽)


특별한 것도 없는 해녀밥을 먹으며 수림은 잘 컸다. 공부는 못하지만 삶에 필요한 자잘한 것들은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야무지게 처리할 수 있는 생활지수가 높은 아이로 상장했다. 엄마는 '전업주부만이 자식 성적 및 체력, 인성 관리를 제대로 할 수 있다.'라는 소신으로 다른 일을 하지 않는다. 덕분에 수림이를 제외하곤 다른 가족들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엄마는 왕이자 시녀였다. 아빠와 언니 미림은 왕의 지시를 따르는 동시에, 시녀에게 별걸 다 시켜 먹는 왕자 공주 같다고 수림이는 말한다. 늘 할아버지에 기대 살던 수림 가족은 할아버지가 빚을 남기고 돌아가시자 궁궐 같던 아파트에서 쫓겨나 '빌라촌'으로 어쩔 수 없이 이사한다. 그것도 우습게 여겼던 거북마을 순례 주택에 입주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사 준비부터 새집 계약, 보증금 협의, 청소, 철부지 같은 부모와 언니 미림을 챙긴 건 빌라촌에서 자란 수림이었다. 이런 수림을 키운 건 순례씨였고.


절제미의 상징, 잔고 999만원


순례 씨에겐 거의 매달 '잔고 시즌'이 온다.
새마을금고 입출금통장에 999만 9,999원이 있는 괜찮지만,
1,000만원이 넘으면 안 된다.
'내가 번 게 내 돈이 아니야. 내가 벌어서 내가 쓴 것만 내 돈이지.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못 쓰고 죽으면 어떡하지?(36쪽)


수림이 주변에 돈이 많아 고민인 사람은 순례씨 뿐이다. 썩지 않는 쓰레기가 될 물건을 거의 사지 않는 사람도, 쇼핑을 싫어하는 사람도 순례씨다. 그래서 그녀는 돈을 쓸 데가 많지 않다. 사야 할 것이 있어도 중고로 사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고 일회용은 절대로 쓰지 않고, 분리수거를 철저히 한다. 세신사를 해서 모은 돈으로 산 순례 주택에서 나오는 월세도 1,000원을 넘지 않는 수준에서 관리한다. 요즘 세상에 이런 말을 들으면 바보라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필요한 것 이상을 탐하지 않는다. 돈만 많으면 최고로 떠받드는 자본주의 세상을 비웃듯 그녀는 그녀만의 철학으로 세상에 해가 되지 않는 것들로 풍요로움을 지켜고 즐긴다.


순례어를 아시나요? : 배움에 대한 열정과 창조성
독립언을 많이 쓸 거야. 감탄을 많이 하는 인생을 살기로 결심했어.


대한민국에서 교과서를 가장 재미있게 읽는 사람인 순례씨, 자기가 쓸 말도 이름도 스스로 정하고 바꾼다. 자기 만의 문자어를 만들어 짧고 편하게 소통하는 발명가이다.  "김밥2 순대1 거북 달아" 순례씨가 수림한테 문자로 보낸 내용. 뜻은 '김밥 두 줄에 순대 1인분, 거북 분식에 외상으로 달아'라는 뜻이다. 이것 말고도 긴 단어는 무조건 짧게 줄여말한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긴 한국어를 축약해서 말하듯 그녀는 그녀만의 스타일로 단어를 줄여 만든다. '킬리만자로'는 '킬리만', '컬리플라워'는 '컬 리프'로. 그녀는 말도 문자도 그렇게 한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순례어'라고 부르고 자동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서 감쪽같이 이해하고 소통한다. 그중에서 최고는 그녀의 개명이다. 음은 그대로 두고 순례의 한자어만 그녀가 좋아하는 '巡禮(순례)'로 바꾸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이유는 그녀가 늘 하던 말 '관광객은 요구하고, 순례자는 감사한다.'에서 온 것이다. 여행을 좋아하면서 관광과 순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녀의 말을 통해 다시금 그 뜻을 새길 수 있었다. 이름을 개명하고 진짜로 그녀의 삶을 감사함으로 채워갔다.  


반전의 취미, 뒷담화의 위력


엄마 아빠는 서로에게 존댓말을 한다.
존중하며 살려고 그런다나.
서로 존중하면서 남에겐 막말을 하는,
남 보기 부끄러운 금실이다.
(p.69)


순례 씨는 '측근들과 얄미운 사람 흉보기'를 좋아한다. 그에 반해 엄마 아빠는 겉보기엔 존댓말을 쓰며 서로를 존중한다. 짐작을 사실로 믿는 엄마, 늘 학번을 먼저 묻는 아빠, 이들은 절대로 싸우지 않는다. 겉보기엔 좋아 보이지만 둘만의 편견에 사로잡혀 다른 이들을 밀어내고 무시하는 걸 알아차려서 일까. 부부는 금실이 좋아 죽지만 수림이는 그 모습이 늘 불편하다. 존댓말을 쓰는 어색한 대화보다 솔직하게 터놓고 흉보는 것이 더 편한 이유는 무엇일까? 문득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가 생각난다. 사람들 모두 눈앞에 이상한 것이 보이는 데도 상대의 눈치를 보느라 쉬쉬하고 말하지 않을 때가 있다. 이럴 때 누군가 콕 짚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말하면 왠지 모를 통쾌함이 있을 것이다. 임금을 상대로 하는 흉보기는 풍자가 되기도 하고 여자들끼리의 뒷담화는 결속력을 다지는 뜻밖의 순기능을 발휘하기도 한다.


어, 너 지금 반말하니? 서로에 대한 존중을 잊었어?
(중략)
타인이 아닌 서로를 공격할 수 있는
엄마 아빠가,
우리 집의 낯선 불화가,
십육 년을 헤매다 찾은 줄자 끄트머리처럼, 나는 눈물 나게 반가웠다.


의 끝부분, 수림의 엄마 아빠는 드디어 속시원히 반말을 하기 시작했다. 수림은 이제야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줄자를 쓸 줄 아는 사람이 된다는 것.


 늘 재미없는 퀴즈를 내던 순례씨가 어느 날 자뭇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수림아, 어떤 사람이 어른인지 아니?" 그리곤 스스로 답을 내놓는다.


자기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이 어른이야.


 늙은 노부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했던 수림의 부모는 아버지를 잃고 나서야 어른이 되기 시작한다. 수림이는 그들에게 순례씨가 빌려 준 '줄자'를 준다. 이는 '어른다움'을 상징한다. 줄자라는 도구를 이용해서 내가 사는 의 크기를 정확히 재고 그것에 맞게 먹고 쓰고 입는 모든 것들을 계산해서 그것에 맞게 돈을 모으고 버는 어른으로서의 책임감을 상징하는 물건줄자가 아닐까.


순례씨와 그의 연인인, 수림이 할아버지는 늘 자기 힘으로 살아보려고 애썼던 좋은 어른이었다. 이에 비해 수림이의 엄마 아빠는 늘 부모에 의존하고 그들 힘으로 그들의 삶을 주도적으로 운용하지 못했다. 이들에게 있어야 할 줄자는 늘 할아버지에게 맡겨져 있었을 뿐. 이들은 순례 주택이 들어오기로 하면서부터 줄자로 집과 가구의 크기를 재고 자신의 형편에 맞게 살림을 줄이는 일을 시작한다. 어른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순례씨는 언젠가 우연히 듣게 된 젊은 엄마들 이야기를 수림이에게 한다. '부모 도움 없이 살기 힘든 세상이지만, 마흔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부끄러운 줄 모르고 떠들더구먼. 아주 '누가 누가 더 어린가' 내기를 하고 있더라고. 늙은 부모가 차를 뽑아 줬다, 애들 학원비를 줬다, 매달 생활비를 받는다. 하면서'.

나도 마찬가지다. 계산이 서툴다는 이유로, 남편이 주는 생활비로 살림을 하고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산다. 버는 만큼 써야지 하는 데, 귀찮다는 이유로 가계부 한번 제대로 적어본 기억이 없다. 회계 전공이라 꼼꼼하게 자금을 잘 운용하는 남편을 둔 덕분에 신혼초부터 남편이 집안의 경제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다. 다행히도 나는 보기만 해도 복잡한 숫자와 씨름하지 않고 편하게 살고 있게 되었다. 집값이 오르고, 대출이자가 오르고, 가계부채가 오르고 월급 빼고 다 오른다요즘, 팍팍한 삶의 무게를 부모에게서 남편에게로 옮겨놓은 것은 아닌지. 괜스레 미안한 마음도 든다. 물론 나도 일을 하고 돈을 벌지만 누군가의 수고로 인해 줄자로 수입과 지출을 재고 상황에 맞게 줄이고 늘이고 저축하는 일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에는 기존의 어른의 모습으로는 버텨낼 수가 없다. 순례씨처럼 주도적으로 자신의 이름과 남자 친구를 고르고 쓸 만큼만 벌고 절대 남이나 지구에 피해를 끼치지 않고 최소한의 것만 취하고 이웃과 나누는 모습, 수림이 같은 어린 사람과도 소통할 수 있는 신식 어른의 모습이 꼭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순례씨를 새 시대, 새 어른의 모델로 강력히 추천한다. 그리고 나도 얼른 내 몫의 줄자를 챙겨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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