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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천개의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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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요일 Nov 08. 2023

솔직한 고백, 깊어진 우리

All Right English

얘들아, 수행평가 점수 확인해야 하니
잠깐 번호대로 앉을까.

아. 샘. 저 점수 안 봐도 되는데
전 확인할 필요 없어요.


순간, 확~ 열이 오른다. '얘네들이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내가 뭘 들은 거지?' 수행평가는 한 번에 치르는 시험이 아니다. 그 노력과 과정은 생각보다 치밀해서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든다.

언어형식(문법)을 배운다.

시험형식과 조건에 대해 오리엔테이션을 한다.

샘플 글을 보여주고 연습한다.

주어진 글쓰기 주제에 대해 각자 조사를 해온다.

1차 초안을 작성해서 제출한다.

모든 아이들 (6반 ×30명=180장)의 글에 피드백을 하고 다시 나눠준다.

피드백을 반영하고 수정해서 2차 초안을 작성한다.

최종글쓰기를 한다. 이때는 미리 준비한 자료 도움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글을 완성한다.

180명을 다시 채점한다.

시험지를 나눠주고 점수를 확인한다.

나이스(경기도교육포털)에 점수를 입력한다.

출력해서 아이들 확인을 받고 전체 아이들의 서명을 받는다.


과정을 약 2~3주에 걸쳐서 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어진 주제에 대해 스스로 글을 쓰고 계속 고치고 수정하며 보다 나은 글을 만드는 것, 교사인 내가 할 일은 많지만 아이들에게는 학습효과가 크기에 일일이 채점해서 확인시키고 틀린 것을 바로잡아 고치는 과정을 반드시 추가한다.


움직이기 귀찮은데

한 번의 논술 수행평가를 마치고 나면 총 3장, 6개 아이들이 수행한 과제를  채점하고 나눠준다. 한 명씩 불러서 확인하고 나눠주면 시간이 많이 걸려서 수업을 제대로 못한다. 그래서 수고스럽지만 아이들에게 번호대로 앉기를 부탁한다. 순서대로 나눠주고 확인하고 걷으면 다시 시험지를 정리할 필요가 없으니 편하고 시험지 나눠주면서 개별피드백을 줄 수 있어서 좋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저 움직이기가 귀찮다. 그래서 확인 안 해도 된다고 말한 것이다. 그 말에 확 ~ 단전에서 분노가 올라온다.


얘들아.

선생님이 이 시험지를 채점하기 위해서 오늘 아침에 4시에 일어났어. 너희들에게 도움이 되라고 숫자로 된 점수가 아닌 시험지를 주는 거야. 틀린 거 한번 더 보고 또 실수하지 말라고. 샘 마음대로 점수 주고 숫자로 결과만 알려주고 여러 과정 거치지 않고 시험 한 번만 보고 점수만 알려주면 샘도 엄청 편하지. 그런데 샘은 왜 이런 수고를 택한 걸까?


너희들이 숫자로만 평가되고 단 한 번의 시험 결과로만 평가되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이야. 1차 초안 때 부족한 걸 2차 초안 때 고쳐 쓰고 연습하고 최종 글쓰기하고. 이런 과정 속에서 샘은 여러 번 채점하는 일이 힘들지만 이렇게 한 이유는 너희들의 노력과 발전을 샘이 직접 보고 인정하고 이건 잘했고 이런 건 좀더 노력해보자하면서 구체적인 정보를 주면서 너희들의 발전에 도움을 주고 싶어서야. 그래서 180장의 시험지를 몇 번씩 보고 또 보는 거라고. 직접 쓴 시험지를 보고 샘이 피드백 준 걸 봐야 너희들 공부에 도움이 될 거고 이번 시험엔 좋은 점수가 아니어도 다음 시험엔 조금 더 나아지지 않을까.


 난 너희들의 미래, 가능성을 위해서 이렇게 복잡하고 수고로운 이 과정을 택했어. 그런데 그렇게 정성스럽게 채점한 시험지 확인하라고 하니까 "확인 안 해도 되는데요." 하면서 귀찮아하면 선생님 기분이 어떨까. 샘은 내 수고가 홀대받는 것 같아 속상하고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고 애쓰는 샘의 노력을 너희들이 모르는 것 같아 많이 서운하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매일 모든 수업 속에서 모든 아이들이 항상 열심히 하는 건 아니야. 누군가는 졸고, 누군가는 멍 때리고 누군가는 딴생각하고 있는 거 알아. 그래도 샘이 항상 웃으면서 최선을 다해 수업을 하고 한 명도 빠짐없이 이름 불러가며 발표시키고 엎어져있는 아이들 깨워 같이 하자고 하는 건 다 같이 공부하고 싶어서야. 잘하는 몇 명만 이끌고 가는 게 아니라. 지금은 아니지만 너희들이 언제라도 공부하고 싶을 때 공부할 수 있도록 선생님은 기다리고 있는 거고 영어를 싫어하지는 않게, 쉽게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쉬운 수업, 즐거운 수업을 하려고 애쓰면서 너희  모두에게 언제든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고 있는 거라고.


잘하는 아이들만이 아니라
모두 다 같이 함께 가려고 애쓰고
단 한 번의 시험,
숫자와 점수로 된 결과만이 아닌
과정과 노력을 샘이 알아봐 주고
그 과정을 칭찬하고 인정해 주려는 선생님의 노력이 잘못된 거니?
너희 모두를 다 같이
다 챙겨서 공부하려고 노력하는 게
너희들한테는 안 보이는 거니?

아니요....



아이들은 유구무언. 나는 이렇게 한바탕 쏟아내고는 한동안 수업을 잇지 못했다. 가끔 일 년에 한두 번쯤 이렇게 울컥 분노가 올라올 때가 있다. 철부지 아이들이 모르고 한 말이고 나를 힘들게 하려고 고의적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가끔씩 세상이 너무 내 노력과 애씀을 몰라주는 것 같은 서운함이 올라올 때가 있다. 한번 더 참을 걸 하는 미안함과 후회가 들기도 했지만 아이들도 이 기회를 통해서 자신의 입장이 아닌 선생님의 입장도 이해해주었으면 했다. 느낌일지는 모르지만 아이들은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고 거친  나의 마음이 있는 그대로 전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가까스로 수업을 마쳤다. 점수 보는 게 필요 없다고 한 아이를 불러다 다시 얘기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 아이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


선생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며칠이 지났을까. 그 아이가 교무실 복도 앞에 서서 나를 불러 세운다.


샘,  샘한테 사과드리고 싶어서요.
제가 집에서 하는 것처럼 함부로.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래. 샘도 알아.
너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란 걸
이렇게 와 줘서 너무 고맙다.



참 괜찮은 아이들이다.

선생님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줄 수 있는 착한 아이들. 울컥함인지 안도감인지 모를 이상한 감정에 한동안 먹먹하다. 나도 아이들도 훌쩍 친해졌다. 마음이 통했고 래포가 더 깊어졌다는 느낌은 그다음 수업에서도 체감할 수 있었다.


선생님, 저희들이 몰라봐서 죄송해요.
 더 열심히 할게요.


라는 메시지는 계속되었다. 더 반짝이는 눈빛에서, 크고 빨라진 대답소리에서 복도에서 마주치면 더 깊이 허리 숙여 인사하는 태도에서 먼저 다가와 짐을 들어주는 마음씀에서 다 전해졌다. 이렇게 우리는 더 깊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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