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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요일 Nov 09. 2024

가을산책

반달이과 반쪽이

토요일 오후

중3아들과 나만 집에 남았다. 어제 공개수업을 하고 진이 다 빠졌는지 몸도 축, 마음도 축 아래로만 가라앉는다. 왠지 모를 감기예감에 한의원에도 가고 내과에도 가 링거도 대 맞았다. 부랴부랴 늦은 점심을 먹고 집안일을 시작한다. 청소기를 돌리고 세탁기에 빨래를 넣고 설거지도 한다. 링거로 얻은 힘을  결국 집안일에 쓰고 만다. 흔적도 없이 에너지를 쓰게 하고 안 하면 즉각 티가 나는 얄미운 잡무, 집안일. 어느샌가 아들이 나와 말한다.


어, 내가 뭘 하면 될까?


반가운 말이다. 의자를 치우고 빗자루로 청소기가 못 치우는  쓰레기들을 쓸어 담으라고 지령을 내린다. 고분고분 빗자루를 들고 구석구석 는 아들의 모습이 왠지 귀엽다.


오늘은 왠지 안양천엘 가고 싶은데~



두 번째 반가운 말이다. 엄마가 좋아할 만한 제안이라는 걸 아는 아들의 맞춤형 제안이다.  마음이 바뀔세라 대충 정리하고 얼른 챙겨 나간다. 밖은 어느새 가을이 한창이다.

아들은 아들대로 걷고 나는 나대로 걷는다. 각자 듣고 싶은 음악을 찾아 듣는다. 나는 사 차선 도로의 소음을 방패 삼아 목청껏 노래도 부른다. 가사에 심취해 손짓 발짓에 리듬까지 맞추며 춤추듯 걷는다. 아들은 그런 내가 창피하다고 소리 한번 지를 법도 한데 그저 말없이 걷기만 한다.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서로의 시간을 존중해 주려는 듯, 훌쩍 큰 아들의 그림자가 오늘따라 길다.


<어디에도> 엠씨더맥스 노래


학교는 연말이라 인사이동을 준비하는 때다. 같은 교무실 사람들 중 절반이 떠난다고. 벌써부터 서운하다. 나라는 사람은 참으로 신기해서 호들갑스럽게 누군가를 좋아한다 하지도 않으면서 헤어질 때만 되면 유난스럽게 사람앓이를 하곤 한다.


아쉬운 마음이 가득해져, 문득 이 노래가 떠오른다. 지난 일 년 동안의 일들이 스치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이 노래를 듣고 또 듣는다. 이다지도 촌스러운 나. 송별회에 이 노래를 불러줘야겠다고 나 혼자 다짐한다. 누기 시키지도 않았는데 말이. 감정이 차올라 산책로가 무대인 양 내 멋대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데도 아들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다.



초록이면서 붉은 담장을 지나

말없이 걷는 동안 올망졸망 가을이 곁을 함께 한다. 친한 동네친구도 만나고 사랑스러운 담쟁이덩굴도 지나친다. 무르익는 가을의 단풍만큼이나 세월을 지나 아들도 나도 무르익어간다. 사춘기를 지나 어른으로 다가가는 시간, 초록초록 아기 같으면서도 노릇노릇 묵직한 어른 같기도 한 아이들. 헤드락을 걸고 몸을 끌어당기며 반가움을 격하게 몸으로 표현하는 아들들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나만 아는 바람을 가을바람에 실어 보내면서.



 아침저녁으로
천국과 지옥 같은 감정을 오가는 아들들
변덕스러운 계절 같은 이때,
환절기 감기처럼 호되게 앓고
눈물, 콧물 다 빼고 푹 자고 일어나면
싹 낫는 것처럼
힘든 이 시기 잘 보내고
더욱 단단해졌으면 좋겠다.



 


뜨끈한 국물이 데워지는 시간

닭한마리의 뜨끈한 온기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 동네 맛집을 찾는다. 약재들을 듬뿍 넣은 닭 한 마리 탕을 시키고 아들과 마주 앉는다. 추운 가을공기에 나른한 몸으로 뜨끈한 국물 한 술을 떠 넣는다. 온기가 깊숙이 스며들어 가슴이 뻥 뚫린다. 맑은 국물에 부드러운 고기의 맛이 깊다. 생생하고 딱딱한 것들이 오랜 시간 열기에 뭉근하게 고 나면 부들부들 연해진다. 아들도 지난여름 유난히 길었던 무더위만큼 뜨거웠던 분노와 불안이라는 열기를 한 바탕 지나서였을까. 큰 고깃덩이 하나 건져 내 그릇에 먼저 건져주는 아들의 손길이 부드럽다. 긴 여름의 열기를 이긴 시간의 힘이 읽힌다. 어느 순간 억센 힘줄을 드러낼지는 몰라도 엄마 앞에선 부들부들해지는 아들의 손길이 오늘따라 싫지 않다.



이른 저녁, 이른 달

부른 배를 두드리며 동네를 어슬렁거린다. 두리번거리는 시선 반쪽 달이 걸렸다. 반쪽이지만 나름의 여린 빛을 내는 그윽함이 따스하다. 아직 완벽한 원은 아니지만 달빛은 그대로 온전하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같이 읽었던 <반쪽이>라는 책이 생각난다.


<반쪽이> 이미배 글, 이억배 그림, 인터넷 캡쳐

반쪽이는 삼 형제의 막내로 눈도 하나, 다리도 하나, 팔도 하나, 모든 게 반쪽으로만 태어났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착하고 부모에게 든든했던 아들이었다. 우리 집 반쪽이들은 몸은 두 배지만 아직 마음도 성장도 아직 반쪽만 차오른 아이들이다. 그 반쪽의 힘으로 엄마를 이해하고 위해주는 마음은 다 큰 반쪽이들. 다 큰 어른들이 가진 것의 1/10만을 내어주기도 아까워하기도 지만 아이들은 아니다. 가진 반쪽을 기꺼이 내어주는 꽉 찬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한 주 용돈 5,000 원으로 엄마에게 줄 빼빼로를 산 막내, 힘없는 엄마 목소리를 알아채고 왜 그러냐고 무슨 일이냐고 묻는 아들, 엄마의 취향을 기억하고 초콜릿을 사서 몰래 냉장고에 넣어둔 큰 딸. 아직 작고 부족하지만 그 자체로는 꽉 찬 마음을 전하는 아이들의 마음이 곱다.


발이 아프다는 아들을 먼저 보내고 동네 찻집에 앉았다. 브런치 앱을 켜고, 오늘 가을 풍경을 차곡차곡 글로 그린다. 울긋불긋 단풍길이며 푹 끓인 국물맛이며 수줍게 웃는 반달이며 뭐 하나 부족하지 않았던 가을산책. 무화과 케이크 한 입까지 베어 먹고는 뿌듯하다. 레몬차의 시큼한 차 한잔에 가을 한잔 머금고 글을 쓴다. 매년 오고 또 오는 계절이지만 늘 이렇게 소중한 건 한 번뿐인 오늘이기 때문이겠지.


문득, 감성팔이 엄마의 요구를 맞추느라 아들의 부르튼 발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내일은 괜찮은 운동화 한 켤레 사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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