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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요일 Dec 15. 2024

소리 내어 읽다 vs. 소리 없이 울다

[북리뷰] 책 읽어주는 남자

이토록 고혹적인 책이 있을까.


첫인상은 충격. 마지막엔 감동. 이 책은 대중성과 역사성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영화고 책이다.



간결한 문체, 상상하는 독자

이 책의 저자, 베른하르트 술링크는 법학 교수면서 판사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 전반의 배경과 주인공의 직업법과 관련되어 있고 전체적인 분위기도 독특하다. 간결하고 적확한 표현,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그리는 듯 묘사하는 장면인물표현은 우아하고 고혹적이다. 영어단어 "gorgeous"가 떠오를 정도. 특히,  전반부에 있는 병약한 15세 남학생의 눈으로 본 신비스러운 36세 여인의 묘사는 사진이나 영화처럼 선명하다.  군더더기 없는 담백한 표현과 단순한 묘사가 시종일관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끌어들인다. 


나의 기억 속에서는 그녀의 당시의 얼굴에 그녀의 나중의 얼굴이 겹쳐졌다. 내가 그녀를 당시의 모습대로 내 눈앞으로 불러내면, 그녀는 얼굴이 없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면 나는 그녀의 모습을 재구성해야 한다
  훤한 이마, 튀어나온 광대뼈, 연푸른 눈동자, 흠잡을 데 없이 매끄럽고 통통한 입술, 각진 턱, 넓적하고 준엄해 보이면서도 여성스러운 얼굴 모양새.




소리 내어 읽다

우연히 만나게 된 15세 남자, 36세 여자. 나이만 보면 심각한 불륜이다. 하지만 이런 세속의 단어를 붙이기엔 조금 부족한 점이 있다. 이들은 그들만의 의식으로 시작한다. 남자는 여자를 만나면 책을 읽는다. 여자는 이야기에 흠뻑 빠져든다. 무미건조한 이야기가 감미로운 음악이 되고 드라마 되는 것처럼 여자는 웃고 울고 흐느끼고 분노하면서 온몸으로 반응한다. 읽고 사랑하고 씻고 쉬는 루틴은 정확하게 지켜졌고 남자는 점점 건강을 찾고 학업에서도 안정된 모습을 보인.


그녀는 신경을 곤두세워 경청했다.
그녀의 웃음소리, 경멸에 차서 씩씩대는 소리, 그리고 격분하거나 동조하여 지르는 외침 등~ (중략)

나는 황혼 속에서 그녀와 침대에 머물고 싶어서 더 오랫동안 책을 읽었다. 그녀가 내 몸 위에서 잠이 들고, 마당의 톱질 소리도 잠들고,... 부엌에 있는 물건들의 색깔 중에서 약간 밝거나 약간 어두운 잿빛 색조만 남게 될 때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다. (60~61쪽)





비밀, 절대 말할 수 없는

한창 사랑을 나누던 주인공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이별이 찾아온다. 전차 검표원이었던 여자는 남자의 학교에 잠깐 나타났다가 불현듯 사라져 버린다. 졸지에 혼자가 된 남자는 8년 후, 대학에 진학하여 법학을 전공한다. 그리고 어느 날, 나치 수용소에서 감시원을 처벌하는 법정에 선 그녀를 다시 보게 된다. 여러 가지 법정심리가 오가는 에 남자는 그녀의 비밀을 추리해 나갔고 그녀가 문맹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 비밀을 끝까지 밝히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결국 모든 잘못을 뒤집어쓰고 종신형을 받게 된다. 과거 함께 여행 갔던 날, 말하지 않고 잠시 나갔다 왔다는 이유로 엄청난 분노를 표출했었던 그녀, 남자는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예요? 왜 그렇게 화가 났어요?

넌 항상 멍청한 질문만 하는구나. 넌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간단히 가버리는 게 아냐.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쪽지를...

쪽지라고?



남자는 범죄자를 사랑했다는 죄책감과 그녀의 누명을 벗겨주고 싶다는 선의가 그녀의 비밀을 누설하게 만드니 혼란스럽기만 하다. 괴로운 고민 끝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감옥에 간 그녀를 위해 다시 책을 읽어주 시작한다. 간단한 메모도 편지도 메시지도 없이 그저 책을 읽고 녹음한 테이프를 그녀에게 꾸준히 보낸다. 그는 동정심만 남긴 채 그녀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었을까. 




소리 없이 울다

무엇보다 선과 악을 동시에 가진 여자, 한나 슈미츠가 궁금했다. 왜 그녀는 승진의 기회를 놓치고 누명을 뒤집어쓰면서까지 문맹을 숨기고 싶어 했을까. 늦게라도 글을 배웠다면 그녀의 삶은 달라졌을까. 어린 남자, 미하엘과 사랑을 나누면서도 그녀는 이해하기 힘든 격한 감정을 드러내곤 했는데 한 번도 자신의 불편함의 이유를 말하고 설명해 준 적은 없었다. 짧은 분노나 울음으로 피하거나 조용히 감추려고 할 뿐 변명도 울분도 토로한 적이 없다. 그녀는 알 수 없는 외로움과 오래된 고독의 옷을 입고 있었다. 구차하게 사랑을 갈구하거나 지루하게 애정을 이어나가지도 않는 그녀. 창백한 피부, 무표정한 얼굴로 15살 남자아이가 토한 흔적을 씻기고 닦았던 것처럼 그녀의 삶은 어둡고 더러운 세상의 찌꺼기들을 침묵으로 씻어내고 막아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악을 읽을 수도 볼 수도 없었으니까.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닮은

영화 <더 리더>의 여자, 한나 슈미트는 케이트 윈슬릿이 연기했다. 그녀는 책 속 한나의 이미지와 정확히 일치했다. 감독도 꼭 그녀를 캐스팅하고 싶어 했다는 후문이. 책을 읽고 나서 한나 슈미트를 생각하니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 떠올랐다. 책, 영화 전체에 흐르는 분위기가 그의 그림을 닮았기 때문이다. 고독하고 쓸쓸한 인간의 모습이 주인공 한나 슈미트와 너무나 똑같았다.


그래도 희망을 잡고 싶었던 그녀

그녀는 출소일을 앞두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왜 그랬을까. 남자 미하엘은 그녀를 위해 지낼 곳과 일할 곳도 알아봐 두었는데. 그녀는 남자를 다시 만나기가 두려웠을까.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수감생활을 했었는지는 이후 교도관의 말속에 힌트가 있었다. 그녀는 남자의 편지를 기다렸었다. 그래서 뒤늦게 감옥에서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그의 편지를 읽을 희망을 품고 산 그녀를 만나던 날, 그는 멀게 만 느껴지는 거리감을 내비쳤다. 그 이후, 그녀는 삶을 그만두었다. 그를 더 이상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을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그녀가 없을 때도 그녀의 그늘에서 살았다. 그의 인생 전체를 그녀가 지배했었다. 누굴 만나도 한나가 겹쳐졌고 그녀와 비교하곤 했다. 그는 정확히 기억하고 상기했다. 그녀를 처음 만난 날, 그녀가 떠난 장면은 늘 따라다녔고 그녀의 향기, 체온은 늘 그대로였다. 동시에 죄책감과 분노가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왜 나는 범죄자를 사랑했을까. 그녀는 왜 그때 자신을 떠났을까. 왜 나는 그때 그녀에게 아는 척을 하지 않았을까." 그토록 함께 했던 그녀를 밀어내고 말았다. 하지만 여전히 질문은 아직 그대로고 그녀는 더 이상 곁에 없다.




후회는 없다

신비스러운 여인, 한나 슈미트, 전쟁시대를 겪은 연약한 여인이고 미하엘은 전후세대를 대표한 인물이다. 책에서 한나의 생각과 의견은 없다. 행동만 있다. 정식으로 교육받지 못한 그녀를 실감 나게 보여주기 위해 그녀의 목소리도 배제했을까. 대신 남자 미하엘의 생각과 이야기가 중심이다. 책을 다 읽고 나니, 그녀가 직접 말하는 그녀의 생각을 듣고 싶다. 아직 못다 한 말이 있지 않을까. 침묵을 선택했기에 그녀의 이야기를 제외한 것일까. 그녀는 아마도 소리 없이 울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끝도 없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어린 남자와 성숙한 여인은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으로 사랑을 나눈다. 머리보다 가슴이 뜨거웠던, 선악과를 먹기 전의 순수한 사랑의 모습으로. 남자 미하엘은 성인이 되어 그녀의 본모습을 재발견하고 괴로워한다. 그는 이성이 여물지 않았고 본능을 따랐던 그의 과거가 그리윘을까 아니면 후회했을까. 때때로 우린 후회라는 이름으로 과거에게 죄를 씌우곤 한다. 순수했던 과거의 행동을 현재의 기준으로  재평가하고 후회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행동은 나름대로의 원천을 갖고 있으며, 나의 생각은 나의 생각이고
나의 결정은 나의 결정이듯이
나의 행동 역시 독자적인 방식으로
나의 행동인 것이다.(31쪽)




#라라크루10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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