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혼모노> 슬로리딩
<혼모노>를 읽고 있다. 배우 박정민이 극찬한 바로 그 책.
넷플릭스를 왜 보나
성해나 책 읽으면 되는데
과연 어느 정도길래 그런 말을 했을까 궁금한 마음에 책을 펼친다. 챕터별로 다른 이야기가 있는데 묵직하게 쿵! 하고 박히는 게 있다. 특히, 사람 간의 미묘하고 복잡한 심리가 적당한 상황과 에피소드에 들어가 밀도 있게 묘사된다. 나도 한번 써보고 싶었던 하지만 쓰기 힘들었던, 아주 사소하고 불편한 감정들, 언젠가 한 번쯤은 겪어봤을 법한, 지금도 겪고 있을지 모를 그런 애매모호한 것들을 맛깔스럽게 그려냈다.
너무 애쓰지 마요.
애쓰면 더 멀어져.
뭐든 열심히 하려고 애쓰는 스타트업 기업의 초년병, 알렉스는 정리되지 않은 갈등을 뒤로한 채 퇴사하는 시니어급 사원, 수잔에게 이런 충고를 듣는다.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말, '애쓰지 마'.
회사라는 곳은 지극히 공적인 공간이고 조직이다. 열심히, 진심으로 일 할 사람을 뽑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사람들은 애송이 취급받거나 조롱이나 갈등의 대상이 되곤 한다. 왜일까. 감정과 기분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에게 감정을 배제한 채 업무에만 충실하기를 강요하는 그런 자조 어린 분위기, 적당히 친절하지만 질척거리면 안 되고 정중하고 매너는 있지만 오버하면 안 된다. 이렇게 어려운 어른 세상에 살아남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때때로 나도 아마추어처럼 열정을 다하곤 한다. 나만의 가치와 성향에 따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그러다 종종 다치고 후회하고 다짐한다. 애쓰지 말자고. 도대체 애쓴다는 말은 뭘까.
마음과 힘을 다해 무엇을 이루려고 힘쓰는 일을 다들 하지 말라고 하는 건 왠지 슬픈 이유가 깔려있다. 그러다 너만 상처받는다. 뭔가 진심으로 하는 사람이 더 깊이 실망하기 마련이라는 뜻일까. 반대로 애쓰다 낙심했다는 말은 그만큼 열심히 했다는 것의 반증일 수도 있겠다.
관성의 힘
장면 1. 관계의 출입문, 인사
긴 복도 끝, 몇몇 아이들이 반대방향에서 걸어온다. 때때로 먼저 인사를 건네기도 했지만 오늘은 그만두었다. 내가 무심하게 지나가자, 아이도 쓱 지나칠 뿐 나를 의식한 그 눈빛은 흔들림 없이 정면을 향해 전진한다. 요즘은 이렇게 내가 먼저 인사하지않으면 아이들10명 중 7~8명은 그저 지나친다. 그런데 이 찰나의 무심함이 달콤하고 시리다. 의무감으로 어떤 제스처를 취하지 않아도 되니 자유롭고, 먼저 인사하는 아이들이 점점 줄어드니 속상하다. 두 가지 감정이 묘하게 섞이다가 요즘은 서운함으로 읽힌다. 일주일에 네 번 수업시간에 만나는 데, 우리는 모르는 사이일까. 이름도 알고 반도 알고 걸음걸이, 머리모양, 목소리도 다 기억하는데.
그 흔했던 목례조차 받기 힘든 것이 요즘 학교다. 꼰대같이 괜한 서운함에 빠지기 싫어서 한 동안 먼저 인사했었다. 차가운 공격에 미리 방어라도 하듯이. 이것도 교육이라고 합리화하면서
00아. 안녕!
(꾸벅)
마지못해 받는 비싼 목례는 씁쓸하다. 수업종이 치고 교실문을 열고 들어가도 마찬가지. 아이들은 책을 꺼내거나 친구들과 떠들거나, 자리에 앉느라 분주할 뿐, 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하는 아이는 한 두 명쯤. 그럴수록 수업의 시작은 꿋꿋하게 "얘들아. 우리 인사하자!!"다. 수업, 만남은 우렁찬 인사로 문을 열어야 제 맛이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 무덤덤한 아이들에게 재미라는 것을 이것저것 쥐어짜 내며 힘겨운 45분 수업을 마친다. 그리고 다시 한번 "다음 시간에 보자!"를 외친다. 이것은 만남의 종료를 알리는 나만의 통과의례. 다행히 다정한 친구 몇 명이 "안녕히 가세요"로 답한다. 그 여린 목소리는 한껏 레이더를 펼친 내귀에 정확히 꽂히고 안도한다.
지친 발걸음으로 교실문을 열고 복도로 나온 순간, 저 끝에서 몇 안 되는 나의 팬들이 토끼처럼 깡충거리며 나를 향해 달려온다.
어, 윤병임 샘이다!!
선생님~안녕하세요~~
그래, 이 맛이지! 찐한 관계의 맛, 인사로 이어지는 끈끈한 힘. 그동안 잘 지냈냐고 밥은 잘 먹었냐고 특별할 것 없는 안부를 묻는다. 몇 마디 오고 가는 대화 속에 저 아래서 서늘했던 찬기가 스르르 녹아내린다.
장면 2. 다 이유가 있어
중3, 세 개반 가르치고 있다. 두 반은 지나치게 조용하다. 사사로운 소통이나 티티카카를 기대할 수 없고 조용히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고 따라 하는 약간 차갑고 또 어찌 보면 흠잡을 데없이 착한 반이다. 그리고 남은 한 반, 5반은 왁자지껄 떠들기를 잘하지만 언어적인 감각이 뛰어난 아이들이 많아 활동이나 게임하면 열광적으로 참여하는 반이다. 특히나 오후시간에는 텐션이 지붕을 뚫을 만큼 업된다. 하지만 반대로 아침에는 바닥을 파고 나갈 만큼 가라앉아있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힘은 들어도 대화가 잘 되는 5반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 반이 어느 날, 걷잡을 수 없이 잡담의 세계에 빠져 제멋대로 떠들기 시작한다.
선생님, 000 노래 틀어주시면
이번 시간에 저 안 잘게요.
이게 무슨,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린가. 평소 자기 기분대로 수업에 참여하는 C군의 말이 오늘따라 거슬린다. 그간 그의 심리상태에 따라 내 딴에는 인내심을 갖고 차분하게 지도했던 터라 그 말이 선(내 인내력의 한계지점)을 넘었음을 감지했다. 가장 긴 하루의 끝, 7교시 수업이라 아이들이 신청한 곡 하나를 듣고 수업을 시작하려고 했다. 그랬더니 한 곡 더를 외치며 더한 C의 말이 화근이 되었다. 평소 게임이나 활동을 하면 참여했다가 설명이 시작되면 바로 책상 위에 엎드려 자는 C가 이쁘게 보일리없다. 그래도 초강력 사춘기인 아들을 떠올리며 여태 다그치지 않고 어르고 달랬던 것. 이런 아이들이 이 반에 3~4명 정도 된다는 게 함정이지만 요리조리 (갈등을) 피해가며 제법 잘 운영해 왔다. 오늘도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잠자지 않고 깨어 수업을 들어주는 것이 나에게 주는 큰 은혜라도 되는 냥 협상을 해오는 것이 괘씸하기만 하다. 한번 거슬린 말은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고 그날따라 유독 소란스러웠던 그 반은 단체로 꾸지람을 들었다.
만약에
내가 애쓰지 않았더라면 제멋대로인 아이들에게 화 나지 않았을까,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을 이뻐하지 않았더라면 인사도 없이 지나치는 아이들에게 서운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누군가의 일방적인 관심과 사랑의 크기가 너무 크거나 넘칠 때, 혹은 원하지 않을 때는 그걸 볼 눈도 감사할 여지도 없는 거겠지. 냉장고 안에 가득 들어있는 어머님들의 김치처럼 있는 것도 못먹는데 자꾸만 새로운 김치를 해서 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나의 애씀도 아이들의 눈에는 보이지도 읽히지도 않는 넘치는 애정일 수도 있겠지. 내 상황에 아이들의 마음을 반사하니 모든 것이 이해되는 것도 같다, 헛헛한 마음으로 퇴근하는 길, 무심하게 지나치는 아이들 속에서 다짐인지 주문인지 모를 텅 빈 말을 되뇌어 본다.
애쓰지 말자.
적당히~천천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