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Talk Friends 정기모임
최근 업데이트한 나의 플레이리스트에는 혁오의 '톰보이'라는 곡이 있다. 후렴구를 특히 좋아하는데 나무가 사계절을 겪으며 만드는 나이테 같은 흔적이 우리에겐 보이지 않고 찬란한 빛에 눈이 흐려지는 안타까움을 전하는 파트가 절절해서 기억에 남는 곡이다.
젊은 우리, 나이테는 잘 보이지 않고
찬란한 빛에 눈이 멀어 꺼져가는데
아아아아아
슬픈 어른은 늘 뒷걸음만 치고
미운 스물을 넘긴 넌 지루해 보여
불이 붙어 빨리 타면 안 되니까
우리 사랑을 응원해
혁오 <Tomboy> 가사 일부
지난주엔 6개월에 한 번씩 보는 20대가 된 제자들과 만났다. 학교에서가 아니라 따로 만나서 책을 읽고 인생을 얘기한 지, 이제 어언 6년째 아니 고등학교 때부터 헤아리면 10년도 넘는다. 제자들이 대학생 때는 1,2주에 한 번씩 만났고 그러다 바빠져서 1달에 한 번씩 보다가 이제는 직장인이 많아져 6개월에 한 번씩 본다. 가장 더운 여름 7월에, 가장 추운 겨울 12월에 책 한 권을 읽고. 지난번에는 <긴긴밤>을 읽고 북콘서트를 했고, 이번에는 <어린 왕자>를 읽고 만났다. 인천에 사는 병호님이 이번 모임의 호스트가 되어 부천 핫스폿에 장소를 섭외했다. 그리고 첫눈이 내린 그다음 날 만났다. 미끄러워진 길을 조심조심 걸어 부랴부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일 년에 두 번쯤 보니, 밀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러는 사이에 흐릿했던 우리들의 나이테가 점점 선명하게 드러나고 서로의 성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된다.
뒷걸음치는 어른
이제 나이 50에 접어든 나는 앞으로 어느 길로 갈지, 고민하다 잠시 주저앉았다. 중년의 교사가 자신의 진로가 제일 걱정이라고 제자들에게 철딱서니 없이 말해버렸다. 누가 들으면 어이없는 이야기라고 하겠지만 소위 말하는 교장, 교감으로의 승진을 할 지, 아님 평교사로 남을지에 대한 고민이다. 요즘 내게 왜 승진 안 하냐고 묻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세뇌라도 당했는지 나도 승진라인에 줄을 서야하나 싶어 어느 날은 작정하고 공문을 찾아봤다. 일단 자격요건이 적힌 공문의 어마어마한 양에 압도되었고, 빽빽이 적힌 승진 요건과 자격 그리고 가산점을 보다가 토할 뻔했다.
학교 전체를 책임지고 이끄는 것이 쉽지 않은 건 벌써 알고 있었지만 거기까지 가는 것 또한 매우 험난해 보였다. 능력도 안되지만 건강마저 해칠 것 같은 두려움에 마음을 접고 그저 남의 일처럼 강넌 너 불구경하듯 했다. 그런데 최근 몇몇 사건을 겪은 후, 나 같은 사람은 평교사로 남으면 조금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승진"이라는 어색한 두 단어를 다시 떠올리기 시작했다. 마치 20대 청춘으로 되돌아간 것처럼 내 진로에 대한 고민이 깊게 나를 누르고 있음을 감출 수 없었다.
20대 청춘들은
5명의 20대 멤버들 중 넷은 직장을 다니고 하나는 대학졸업반이다. 셋은 평범한 직장에 다니고 다른 하나는 대기업에 다닌다. 다른 건 모르겠고 대기업과 일반 회사는 저녁시간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대기업에선 저녁시간의 여유는 꿈도 꿀 수 없다고 했다. 아침 7:30분 회사 컴퓨터를 켜 일을 시작해서 밤 10시나 돼야 컴퓨터를 끄고 퇴근할 수 있다고. 주말에는 당연히 집에서 일을 더 해야 하는 루틴. 그 팍팍한 삶에 우린 모두 혀를 내둘렀다. 이들의 삶엔 지루함 따위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보다 심한 건 대학교 졸업반 주연이었다. 알바 두 개에 학교 수업, 어린 동생과 곧 결혼할 언니까지 챙기는 그녀의 꽉 찬 일정과 마음씀에 안타까움이 일었다. 심지어 최근에는 대상포진까지 앓았다고. 그 말에 나는 그만, "정신 차려"라고 말하고 말았다. 자신을 챙기라고 자신을 잘 돌보는 게 더 중요한 거라고 호통을 치고 말았다.
못 말리는 ENFJ
대기업 다니는 제자, 대학 졸업반 주연이 그리고 나까지 mbti가 ENFJ다. 우리끼린 살짝 통하는 게 있다. 남에겐 싫은 소리, 도와달라는 부탁의 말을 좀처럼 하지 않는다. 대신에 자신에겐 엄격하고 때론 가혹하다. 주변의 사람이 잘못되면 내 잘못인 것 같고 남의 일을 내 일처럼 공감하고 걱정하는 오지랖형 인간인 것이다. 그런 유형은 부지불식간에 번아웃이 찾아온다.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는 깊어지고 <어린 왕자>의 고독한 왕 같은 직장상사 이야기에, 늘 쳇바퀴 돌듯 바쁜 일상이야기, 목마름을 못 느끼게 하는 약을 마시고 53분이 주어진다면 뭘 할 거냐는 질문에 답하다가 이 책의 숨은 주인공은 여우였다며 "길들이다"의 숨은 의미에 감동했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깊고도 짧았던 시간. 어느새 지하철 막차시간이 다 되었다. 자리를 마무리하려는데, 마지막에 석환이는 절규하듯 한 마디를 던진다.
<연금술사>에서 나온 행복을 찾는 방법처럼 한 손에는 기름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여유롭게 주변을 보며 가려고 했는데, 한 손에 주어진 기름이 너무 많고 무거워서 주변을 볼 여유가 없어요.
"행복의 비밀은 이 세상 모든 아름다움을 보는 것. 그리고 동시에 숟가락 속에 담긴 기름 두 방울을 잊지 않는 데 있다."
책 <연금술사>중에서)
너의 그 한 마디가 아프다.
한 손에 쥐고 있는 기름이 너무 무겁다는 말, 일자리는 줄어들고 바늘구멍 같은 취업에 성공한 너는 살인적인 업무에 시달리고. 승진을 해서 직급이 올라가도 상황이 더 나아지지는 않는다는 말에 더 깊은 한숨이 더해진다. 더 많은 일을 더 적은 수에 사람들에게 던져주고 무한으로 경쟁하게 만드는 구조. 대기업에 임금이 더 많은 건 다 이유가 있었다. 혼자서 2~3명의 일을 해야 하므로.
젊은 우리, 나이테는 잘 보이지 않고
찬란한 빛에 눈이 멀어 꺼져가는데
그래 그때 나는 잘 몰랐었어
우린 다른 점만 닮았고
철이 들어 먼저 떨어져 버린
너와 이젠 나도 닮았네
혁오 <Tomboy> 가사 일부
그 시절,
교실 안에서 우린 학생과 교사로 멀기만 했지.
하지만 이젠 사회라는 곳에서
나이도 직업도 상관없이 비슷하게 닮아버렸네.
경쟁 속에 똑같이 치이고
순수한 열정으로 바보처럼 일하다 멍들고
매일 전쟁터 같은 일터에서 겨우 살아남아
던지고 버려진 자존감에 익숙해져
무덤덤한 것처럼 보여도
어느 날 문득 왈칵 울음을 쏟고 마는
풋내기 같은
어설픈 어른이 되고 말았다.
어쩌면 계속 철없는 아이처럼 지내고 싶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말괄량이, 개구쟁이
어린아이처럼
동네 골목이나 어슬렁거리는 한량처럼 살고 싶었을까.
겪어도 꺾여도 한결같이 숙맥 같은
쿨한 척 아닌 척 모른척해도
속상하고 상처 입은 어른 놀이는
해도 해도 적응 안 되는 장르 없는
연극 같기만 하다.
막차, 안녕!
허겁지겁 막차에 올라 타 아직도 다 듣지 못한 우리들 인생 이야기. 애잔한 여운이 돌고 또 돌아 반복되는 플레이리스트 음악처럼 익숙해진 노래처럼 어렴풋한 아쉬움으로 멀어져 간다.
얘들아.
추운 겨울 같은 혹독한 시간
굳건히 잘 견뎌내고
조금 더 또렷해진 나이테로
씩씩한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자.
#라라크루13기
#독서모임
#10년째
#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