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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나잇 Feb 12. 2023

칼의 무게

숨기느냐 꺼내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가끔은 글에서 묻어나는 모든 사치스러운 말들을 빼기로 했다. 힘 빼는 데에 재능이 없는 나지만, 매일같이 잔뜩 힘이 들어간 글을 쓰다 보니, 보는 이들에게 꽉 막힌 고속도로 같이 느껴지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마치 고구마를 잔뜩 머금은 듯 갑갑한 내 마음 상태처럼 말이다.     


나는 사람과 갈등을 겪고 나면 며칠간 몸살을 앓는다. 처음엔 내가 받은 상처가 너무 아프고 화가 나서, 분노 섞인 감정을 허공에 마구 분출해 댄다. 기분이 덜 풀린다 싶으면 누군가에게 피해 주지 않을 정도의 소음을 내지르기도 한다. 마음을 힘들게 하는 일을 겪고 나서, 반나절 정도는 그렇게 내 아픔에 집중하며 슬퍼하는 편이다.     


그리고 마저 아파해야 할 남은 날 동안은, 남의 상처로 마음이 기울어진다.     


스스로 잔뜩 화나있는 상태를 직관할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 또한 나에게서 얻은 상처로 곪아서 잔뜩 부르터 있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과 괴로움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곤 한다. 내 심성이 고와서가 아니다. 실은 이마저도 나를 위한 일이었으니. 나는 표면적으로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내 배려 아닌 배려는, 누구나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기 위하여 베푸는 알량하고도 이기적인 호의일지 몰랐다.


지금으로부터 몇 해 전, 어떤 일로 인해 크게 상심한 적이 있다. 전에 협업했던 분에게, 새로운 프로젝트를 제안받았던 때였다. 회의를 순조로이 마치고 내가 작업한 결과물에 대해 마무리 컨펌을 받으려던 참이었다. 결과물에 대해 수정사항이 크게 없는 작업이라 전해 들었기에, 내 일상의 틈을 일부 쪼개어 참여하게 된 프로젝트였다. 더군다나 그때 내게 연락을 주셨던 분은 내가 참 좋아하는 분이었다. 사실 그 제안을 쉽게 승낙한 데에는 그분 자체라는 존재의 이유가 가장 컸다. 다른 이였다면 단칼에 거절했을 법한 일이었다. 들이는 시간 대비 페이가 매우 적었지만, 그분과 함께 해왔던 여정은 내게 편안함과 행복감을 안겨 주었기에. 포근한 기억을 되살려 지나간 영화를 다시 한번 보러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의 나는, 좋은 관계를 맺은 주변인과 함께 일하는 것을 웬만하면 피하려 한다. 한낱 노파심과도 같다. 서로에게 미움이라는 감정 털끝만큼이라도 피워낼지 모를 상황에 놓이는 것이, 마음 아프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들어온 그 길 그대로 도망칠 것만 같았다. 내가 그때 내린 결정을 두고두고 원망하게 될까 봐 무서웠다. 그런데, 서로라는 의미에 있어 이토록 겁쟁이인 내가, 그의 제안에는 주저 않고 선뜻 나서게 됐다. 단 하나의 마음이었다. 언제나 응원하는 그 사람에게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꺼내어 주고 싶다는.      


약속대로 나는 최대의 시간을 투자해 내 최선을 담아낸 작업물을 건넸다. 그는 함께 펼친 노력의 결괏값에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더할 나위 없을 만큼 서로를 격려하며, 작은 단란함으로 천둥 같은 고단함을 이겨내고 있었다. 분명, 윗선과의 회의를 마치기 전까지는 그랬었는데. 전쟁터에서 돌아온 그는 제일 먼저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고는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처참한 패배 소식을 전해왔다. 그의 곤란한 마음을 들여다보며 어딘가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른바 전체적인 대공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나는 그 순간 이유 모를 억울함에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혼자 걸으라며 내게 가시밭길을 내놓는 그가, 한순간 돌아서버린 남처럼 느껴졌다.      


나는 물었다. 지난번과 동일한 방식으로 진행한다고 말씀하셨고, 그를 토대로 회의 후 작업을 진행하지 않았느냐고. 그러자 그가 답했다. 그렇죠... 그런데 윗분 중 한 분께서 지난번 다른 분에게 맡겼을 때부터, 여러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대요. 또, 어떤 부분은 쓸모없어졌으니 통으로 들어내고 다른 방식으로 교체하자는 말을 덧붙다. 나의 며칠 밤 노고는, 그들의 말 한마디로 일순간 모든 쓸모를 잃게 되었다.

  

쩔쩔매는 휴대폰 앞에서 입을 다물고만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기가 찼다. 단 한 명의 의견으로 전체가 휘둘리는 것도, 누군가의 시간과 노력을 폄하하는 무자비한 행동도, 도무지 납득이 안 되었다. 내 시간이 아까우면 남 시간도 아까운 줄 알아야지. 작업물에 문제가 있다면 순순히 이해하겠으나, 멋대로 끼워 맞춘 이유 없는 의견들이 울퉁불퉁했기에, 이 일에 오롯이 몸담았던 내 시선으로는 감내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마음에는 세차게 장맛비가 내렸지만, 모두의 생각을 존중하자는 일념과 그를 곤란하게 만들 수 없다는 의리에 젖어들어, 그가 전해온 모든 부분을 수정하겠노라 답했다.      


그와의 통화에서 먹히지도 않을 나의 견해를 알리는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기만 했고, 말투 또한 상냥하게 내뱉어지지 않았다. 결국 그들이 원하는 대로 수정하고 나니 전혀 다른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허탈함이 찾아옴과 동시에 수신자 없는 배신감마저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들의 세밀한 사정까지는 알 도리가 없었으나, 변동사항을 미리 언급해 줄 시간과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작업 전에 전달받았다면, 회의를 거듭해서라도 방향을 틀었을 텐데. 진심과 열정으로 버무려 놓은 것을 이제 와서 전부 망가뜨리는 잔인한 짓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일이었다. 이 부분은 비단 자신의 작업물을 내는 사람뿐만 아니라, 일상 속에서 그 어떤 일을 배당받은 사람이라고 해도 부당한 처사라고 느낄만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나에게는 하늘의 무너짐과도 같은 무차별적인 통보였다.     


나는 가끔 화가 나면 앞이 잘 보이질 않는다. 중재자의 역할로, 거듭 미안함을 표하는 그에게 어떤 말을 건넸는지, 어떤 말투로 답했는지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 일이 있고 나서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할 정도로 많이 아팠다. 물론 반나절은 온전한 억울함으로 보냈고, 이후의 날들은 혹시나 그에게 남겼을지 모를 상처를 끌어안고 굴러다녔다. 몇 번이고 생각했다. 내 태도가 잘못되었나. 그들은 갑이고 나는 을이니까, 나는 그저 시키는 대로 했어야 했나. 왜 내 새로운 도전은 매번 이럴까. 몸속 장기들이 역순으로 꼬이며, 또다시 벼랑 끝에 홀로 서게 된 기분이 들었다.     


대화의 이면에서, 내가 모르는 바깥의 상황에서, 그 또한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함께 협업하는 파트너였기에 책임이 적다고 말할 수 없겠지만, 윗선의 급작스런 횡포 앞에서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세상과 강하게 맞서려다 끝내는 무릎을 꿇고, 폭탄 같은 재배치를 안겨줬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가 뒤에서 나를 어떻게 말하고 다니든, 내 앞에서의 그는 여린 사람이었다. 혼자 삭혀냈어야 했을 화를 엄한 이에게 풀어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심장 한쪽이 자꾸만 거뭇하게 타들어갔다.      


나는 여전히 나에게 어떤 부당이 주어졌을 때, 내가 내뱉었던 주장이 진정으로 타당한 것이었나 하는 의문을 가진다. 나만 기분을 억눌렀으면 다 편안하게 끝났을 일은 아니었을까 안일한 고민도 뒤늦게 한다. 다른 이에게 상처 낼 것을 각오하면서까지 나를 지키는 목소리의 경계선을 가려내는 일이란, 입을 조용히 다무는 것보다도 훨씬 어렵게 느껴진다.

  

사람은 누구나 칼을 품고 있다. 그리고 그 칼은 입술을 열 때마다 제각기 다른 형태로 뿜어진다. 때로 부드러운 유아용 소꿉놀이 나이프의 됨됨이를 하고 대화들을 조화롭게 요리하는가 하면, 어떤 날엔 날카로운 중식도로 변신해 누군가의 살갗을 자비 없이 도려내기도 한다. 누구 한 사람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다른 이를 베어버릴 말의 힘이 존재한다. 그리고 상대가 흘린 피는 가끔 나에게 더 큰 상처로 되돌아온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주어진 칼을 적절히 조절하며 쓰임새에 맞게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직도 칼질이 참 서툴다. 내내 유아용 나이프로 살아가려다가 누군가 슬쩍 나를 건드리기만 해도 주방용 과도를 꺼내드는 것 같다. 꺼낼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가장 좋겠지만, 굳이 꺼내야만 한다면 그 갈고닦은 매서운 칼날을 언제 드러내야 타당한 것일지 터득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공들여야 할 것만 같다. 어떤 것을 도려낸 뒤엔 꼭 후회와 아픔이 따르기 때문에. 내가 냈을지 모를 상처가 영영 아물지 않으면 어쩌나 우려되는 마음이, 더 이상 나를 좀먹게 두고 싶지 않아서. 돌고 돌아 결국은, 보이지 않는 순간의 칼날을 감추는 법에 대해 익히고 싶다고, 요즘의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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