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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꿈 Jul 29. 2020

재능기부의 빛과 그림자

얼마 전 우연히 본 소셜네트워크에는 한 음악가의 하소연이 올라와 있었다. 내용인즉슨 자신은 소소하게 음악활동을 하고 있는 인디뮤지션인데 어느 날 한 지역의 축제 담당자가 전화로 섭외 요청을 해왔다고 한다. 문제는 진행 시간이나 지급 금액 등이 결정되지 않은 채로 먼저 참여 의사를 물었다는 것이다. 현재 아무것도 확정된 것은 없지만 좋은 취지의 행사이니 재능기부 차원에서 출연을 고려해달라는 뜻이었다. 음악활동을 전업으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모든 일정을 행사에 맞추기는 힘들다고, 정확한 시간과 지급 금액을 확인해 다시 연락을 부탁하니 담당자가 오히려 불쾌한 내색을 했단다. ‘친히’ 연락을 해 이 정도 규모의 행사에서 자신을 홍보할 기회를 줬는데 분수도 모른다는 식의 뉘앙스를 비춰 무척 당황했으며 결국엔 고사를 했다고 한다. (2012년 ‘청년유니온’에서 진행한 <청년뮤지션 생활환경 실태조사> 조사에 따르면 뮤지션들 대다수는 한 달에 평균 69만 원 수입으로 버텨가며 음악활동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자 221명 중 65퍼센트가 음악이 주업이며, 77퍼센트는 생계를 위해 음악활동 외에 강습과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해당 사연을 읽고 ‘슬퍼요’ 감정표현 칸을 꾹 누르며 쉬이 넘어가기에는 어쩐지 여러모로 기시감이 들었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단체에도 현재 수천의 인원이 자원활동과 재능기부 등으로 참여하고 있고, 나의 업무 역시 그러한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하는 일들이 적잖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과연 나는 자원활동가들이 내어주는 시간과 능력에 대해서 쉽게 생각한 적이 없었을까? “악기 연주 좀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우리 곧 행사 있는데 재능기부 한번 하시죠?” “친한 친구 중에 디자인 전공자가 있다고 하셨죠? 좋은 일 하는데 좀 도와줄 수 있냐고 전화 한번 해주실 수 있으세요?” 이처럼 알음알음 방식을 통해 편히 해결하고자 했던 나의 태도들이 한 음악가의 글을 통해 불쑥 떠올랐던 것이다.           


              

재능기부라는 달콤한 유혹        

            

자원봉사(Volunteer)라는 말의 어원은 라틴어 ‘볼런타스Voluntas’에서 유래한 것이며 ‘자유 의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볼런타스는 일종의 의무나 책무감이 아닌 자발적 참여를 전제로 한다. 기본적인 의지 발현이 ‘주고자 하는 자’의 주체성 안에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자원봉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능력을 기반으로 공동체에 기여하는 아름다운 나눔의 한 측면임에 틀림없다.        

       

한국사회 안의 자원봉사 인식이 확산되면서 동시에 재능기부의 영역도 훨씬 다양해지고 커졌다. 일반적으로 재능기부에 대한 인식은 봉사활동 개념과는 좀 다른 전문적인 영역에 대한 요구와 밀접하게 닿아 있는 것 같다. 최근에는 지자체를 포함한 다양한 기관들이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개인과 단체를 필요한 곳과 직접적으로 연결해주는 매개 역할 또한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늘 인력과 자본이 부족한 비영리센터에서는 다른 곳보다 재능기부 요청에 대한 유혹(?)에 빠지기 쉽다. 공통의 사회적 목적 달성을 위해 다양한 참여방식을 확보하고 대상을 모집하는 소통 작업은 시민단체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무척 소중한 활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접근이 단순히 비용절감 측면만 고려된다면 최소 투입, 최대 산출이라는 영리적 사업의 목적성과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동시에 조직 안에서 이처럼 재능기부자들을 잘 ‘끌어오는’ 실무자를 높이 우대하는 분위기 또한 고민해볼 지점이 존재한다. 적절한 사업 계획안에서 해당 영역에 적합한 비용을 책정하고 집행하는 것이 과연 섭외 능력이 떨어지는 이의 보수적인 사업 운영 방식이라 할 수 있을까?               


여러 단체나 기관에서 사회적 목적을 앞세워 재능기부를 너무 쉽게 요청하거나, 지나친 의미 부여를 통해 무대가성만을 강조했기 때문인지 최근 전문영역을 가진 프리랜서들 사이에서는 재능기부 요청을 기피하는 분위기까지 있다고 한다. 음악인 노동조합 ‘뮤지션유니온’이 조합원을 대상으로 한 예비조사 결과에 따르면 재능기부 요청 시 ‘강요받는 느낌이 있다’가 74퍼센트, ‘재능기부를 거절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적이 있다’가 68퍼센트, ‘재능기부가 창의적 활동에 방해가 된다’가 68퍼센트로 재능기부에 대한 부정적인 수치가 꽤 높이 산출되었다.               


이런 문항과 함께 의미 있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재능기부로 인해 대중과 예술가의 관계가 왜곡될 수 있다’에 대한 답변이 79퍼센트로, 선한 의도의 재능기부 참여가 혹시 시장 혼란을 일으켜 자신의 직업군 전체가 값싼 노동력으로 내비칠까 두려워하는 생계유지의 측면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본적인 재료비나 교통비를 요구해도 ‘예전에 다른 분은 아무런 요구가 없었는데 왜 그러느냐’는 식의 분위기가 조성된다면 앞으로는 점점 더 지급 요청이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선 자신이 돈만 아는 속물로 여겨지는 것 같아 울며 겨자 먹기로 100퍼센트 무보수 참여를 승낙하는 경우도 퍽 많다고 한다.        

       

이렇듯 어떠한 대가도 요청할 수 없기 때문에 기형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바로 ‘스펙으로서의 재능기부’이다. 재능기부 자체가 일종의 이력으로 이용되어 외부 노출이 많은 지자체나 대형기관의 경우에는 그 섭외가 쉽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별 따기가 되는, 일종의 재능기부에 대한 빈익빈 부익부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좀 더 넓은 시점에서 바라보자면, 기준 없는 다발적인 재능기부 요청과 참여가 기부하는 개인이나 그것을 받는 기관 생태계 모두에게 장기적으로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비용을 지출한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에서는 투자하는 그 시간과 에너지를 인정해주는 것을 뜻한다. 재능기부 또한 시간과 에너지가 투영되는 엄연한 경제활동 가운데서 발생하는 것이며, 환산된 결과물에 대한 전체 비용을 기부 받는 형태인 것이다. 그것을 ‘돈’이라고 정확히 인지하면 그것을 내어주는 것에 대해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만은 없다.               


‘기부’라는 행위로 예를 들어 보면, 주고자 하는 이의 의사를 명확히 확인하지 않고 상대방 지갑에서 돈을 꺼내 간다면 그것은 기부가 아닌 갈취에 해당할 것이다. 재능기부의 결과물만 쉽게 쏙 취하려는 것은 바로 그러한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기본적으로 전문영역의 재능기부를 받을 때에는 그것이 그들의 생계수단임을 명시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볼런타스의 의미를 상기하자면 ‘타율적 재능기부’( ‘자율적 재능기부’는 스스로의 판단과 의지에 따라 재능 기부처를 찾는 기부 행위를 말한다. 이는 재능기부 및 기부처에 관한 충분한 정보 습득과 그에 따른 판단이 정해진 이후 행하게 되는 특징을 갖는다. 이에 반해 ‘타율적 재능기부’는 기부처에게 재능기부를 요구받는 경우를 말한다. 전문 예술인의 재능기부는 대부분 이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예술인 재능기부 담론 전환이 필요하다> 한국대중음악학회, 강상구, 2016년) 란 주고자 하는 자의 자유의지에 반하기에 정확히는 기부라고 칭할 수 없는 것이다.               


단순히 진행 프로그램에 대한 예산이 부족하다면 재능기부에 혈안을 쏟는 것보다 명확한 사회변화 목표를 가지고 결이 같은 기업의 사회공헌기금을 공식적으로 끌어와 사업을 진행하는 것이 옳아 보인다. 혹은 기본적으로 전문적인 영역에 대한 비용을 지급하고, 추후 취지에 대한 설명과 함께 부담을 가지지 않는 선에서 자율기부의 기회를 열어주는 방식처럼 기부자에게 그 주도성을 넘겨주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특히 어떠한 곳보다도 사람의 소중함을 믿고 사람의 힘으로 사회를 바꿔가고자 하는 시민단체라면 어려운 상황 속에서 자신의 재능을 바탕으로 생업을 이어가고 있는 이들에게 무조건적인 무보수 형태의 재능기부 요청은 다시금 생각해볼 지점이다. 그들 또한 이 사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역할로 ‘이용’이 아닌 ‘인정’의 측면에서 지원 형태의 협업구조를 취할 수 있다면 오히려 더 가치 있는 사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행복한 개인이 행복한 사회를 만든다                   

 

재능기부 참여를 당연시하는 시각 중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이렇게 좋고 가치 있는 일인데 개인의 작은 희생 정도는 감수할 수 있지 않은가’에 대한 것이 아닐까 싶다. ‘더 좋고 가치 있는 사회 만들기’라는 거대담론 앞에 개인은 자신의 이익을 피력하기 어려워진다. 자연스럽게 거대한 것은 작은 것의 강제적인 선의를 요구하게 된다. 또 잃은 이는 빼앗기면서도 준다고 스스로 위안하기도 한다.         

      

그간 한국 사회를 뒤돌아보았을 때 오랜 기간 우리를 지배해온 이와 같은 거대담론 우위의 구조가 재능기부를 둘러싼 시선 속에서도 답습처럼 남아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본다. 국가의 성장을 위해, 우리 지역의 발전을 위해, 우리 가족의 행복을 위해 언제나 누군가는 당연히 희생을 해야 하는 구조 속에서 이제는 다시금 개인에게 그 초점을 맞춰갔으면 한다. 건강한 개인이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고, 행복한 개인이 모여 행복한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이런 측면에서 바라보면 앞서 언급한 ‘상대적으로 유명하지 않은 예술가들의 재능기부’에 대해서도 지자체는 그들에게 기회와 경험을 주는 것으로 자신들을 정당화하지 않았으면 한다. 해당 행사가 진정한 호혜를 기반으로 한다면 참여의 방식도 공정하게, 서로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기획되어야 할 것이다. 좋은 일이기 때문에 더욱, 희생을 개인이 떠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참여하는 자체가 즐거운 일이 될 수 있게 섬세한 배려가 필요하다.               


사회 변화라는 것은 확실한 결과물로 산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 개개인의 충실한 삶이 반영된 영속적인 흐름 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강요된 힘에 의해 억지로 부여된 의무가 아니라,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책임의식이 반영되었으나 그 과정에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보장된 나눔이야말로 공동의 소중한 결과물일 것이다. 이런 신뢰를 중심으로 건강하고 평등한 관계와 교환을 통해 우리 사회는 조금 더 아름다워질 것이고, 또한 많은 이들이 자신의 재능을 선뜻 나눌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진정 능력 있는 사회활동가의 모습일 것이다.                         





(해당 글은 격월간 대안교육 잡지 '민들레' 2018년 8월 호에 수록된 기고문 임을 밝힙니다. 약간의 내용 수정 과정을 거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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