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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꿈 Jul 26. 2020

교육의 틈새, 비영리 교육의 역할

    


학교, 휴전의 공간    

                

스승의 날이 가까워오는 5월 무렵이면 고등학교 때 기억이 하나 떠오른다. 입학식을 하고 얼마 지난 후였으니 3~4월이었던 것 같은데, 쉬는 시간 복도에서 뛰다가 다른 반 수업에서 막 빠져나오는 담임선생님과 부딪혔다. 아뿔싸! 나는 무척 당황했고 선생님의 얼굴에는 노기가 역력했다. 선생님은 지시봉으로 내 머리를 톡 치며 물었다.               


 “이 녀석! 너 몇 반이야?"          

     

친구들에게는 이 에피소드를 우스개처럼 떠들어댔지만 지금까지 이 장면이 기억에 남는 것을 보면 자기 반 학생을 알아보지 못하는 선생님에게 내심 섭섭한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과연 이런 상호 관계성의 한계를 각 교사들의 부족함으로 전가할 수 있는 걸까? 대학에서 국문학과 교육학을 전공하고 단기 교사로 잠시 학교에 있었던 경험을 미루어볼 때 대부분의 교사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참 열심이었다. 교과교육과는 별도로 개별 업무도 많이 할당되고, 내·외부 행사도 잦고, 요즘 학급당 인원이 많이 줄었다지만 여전히 과밀학급도 있는데, 이 모든 구조적, 감정적, 육체적 어려움을 한 명의 교사가 모두 감당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오히려 내가 관계의 커다란 장애요인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학교라는 구조 자체가 교수자와 학습자로 강력하게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내가 교사를 꿈꾸었던 이유는 자유스럽지 못했던 학창 시절을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아서였는데, 정작 내가 학생지도 담당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에게 심판을 가하는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던 것도 그 일면일 것이다. 이와 함께 손꼽고 싶은 또 다른 문제는 학생뿐 아니라 교사들조차 학교 안에서 주체적으로 시도하거나 참여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제도 교육 안에서 새로운 시도나 실험이 다소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 엿본 학교는 내가 학생으로 경험했던 때나 지금이나 구도적으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아 보였다. 여전히 학교는 교사는 교사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각자의 자리를 치키며 자신들을 방어하고 더러는 공격하며 그 이상을 기대하지 않는, 일종의 오래된 휴전의 공간과도 비슷했다. 변화의 필요성은 암묵적으로 모두 느끼고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결국 교사의 꿈을 접고 다양한 교육기획과 교육사업을 진행하는 비영리조직의 교육부서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유아부터 성인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왔다. 해당 연령대에 따라 준비 내용이나 강사의 역할 등이 상이해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개별 대상마다 전달해주는 매력과 즐거움도 제각각이라 지루할 틈이 없다. 또한 실제 교육 참여자들이나 비슷한 영역의 교육 실무자들과 워크숍 구성, 주제 교안 제작, 신규 교육 사업 기획 등 새로운 아이디어를 수렴하고 실행해보는 과정을 통해 호혜와 협력을 체험할 수 있어 준비하는 내게도 큰 학습이 된다. 사람을 모으고 새로운 것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것에 큰 즐거움을 느끼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가고 있다.     

             

             

교육과 교육사업의 차이


나는 그동안 비영리조직의 교육이 공교육과 대안교육 그리고 마을교육 등의 다양한 교육 형태와 교육 담론 안에서 어떠한 역할과 위치를 잡아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해왔다.       

        

내가 일하고 있는 기관은 재사용 자선가게 charity shop를 중심으로 기증된 물건의 재사용과 재순환을 통해 사회의 생태적ㆍ친환경적 변화에 기여하고 국내외 소외계층 및 공익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나눔(그물코)과 순환(되살림)'이라는 가치 안에서 자신과 타인, 오늘과 내일, 개인과 사회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끊어진 관계를 되살리는 활동을 많은 시민들과 함께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가치 안에 교육부서는 미래세대에게 재사용 순환운동의 가치를 이해하며 나눔에 동참할 수 있도록 공동체, 윤리적 소비, 공정무역, 업사이클링 영역의 인지‧실천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나눔 교육이란, 이러한 관계적 문제들을 나눔과 공존을 통해 해결하고 자신의 삶에 대한 관심과 참여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으며 작은 실천으로도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교육이라 말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지속성을 띄는 교육활동과는 달리 ‘교육사업’은 프로젝트 형태로 짧게 구성되어있는 편이다. 이러한 교육사업을 기획할 때는 투입과 산출이 명확해야 한다. 즉, 얼마의 인원과 비용이 투입되어서 어떠한 효과를 정량적으로 확인할 수 있느냐가 큰 요지다. 교육부서의 경우 그 정량 수치는 교육 횟수나 참여 인원 같은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효용성을 앞세우는 ‘사업'이라는 단어가 지속성을 필요로 하는 ‘교육'이라는 단어와 엮일 때 고민이 생긴다는 것이다. 교육 사업은 ‘교육’과 ‘사업’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속에서 그 균형점을 찾아가야만 한다. 이때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교육을 위한 사업'은 가능하지만 역으로 ‘사업을 위한 교육은' 성립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정량의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무척이나 중요하다. 예를 들면 나눔 교육을 하는 교육부서의 목표 설정이 모금액인지 교육 횟수인지, 교육 인원인지에 따라 그 사업의 성격이 일면 드러난다. ‘〇〇을 위해 교육을 하느냐', '교육의 결과물로 〇〇을 가져가느냐'는 생각보다 큰 차이가 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특히 미래세대를 만나는 교육부서에는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사항인 것이다.          

     

언젠가 학교를 찾아가 나눔 교육을 진행하는 다른 비영리기관 실무자를 만난 적이 있는데, 자신이 하는 일이 교육이 아니라 마케팅 같다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자신의 역할이 교육 자체보다는 ‘모금함 전달’에 쏠려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된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해당 기관에서 정량적으로 평가하는 건 학생들과의 유의미한 만남보다는 교육 횟수와 모금액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참여와 변화의 산출을 단순히 모금액으로 상정해 버리면 교육 내용은 동정을 이끌어 내기 위한 감성적이고 자극적인 내용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아 정작 나눔의 의미는 곡해될 수도 있다.               


최근 혁신교육과 관련한 많은 지원금이 투입됨과 동시에 그 기금을 활용해야만 하는 영역이 덩달아 커지면서 혁신학교 교사나 담당 공무원, 시민단체 실무자들이 사업을 진행하는 데에만도 여력이 없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시나 구 차원에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 교육의 과정이나 내용보다는 그 성과에 대한 압박이 클 것이다.               


나 또한 이런 내용을 잘 알면서도 어느 순간 숫자에 매달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때가 있다. 숫자가 주는 명확함에 나도 모르게 매료되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관계'라는 측면에서 참여인원이나 교육 횟수가 담아내지 못할 영역들이 많이 존재한다. 그래서 숫자는 깔끔하고 명확해 보이지만 사실 많은 부분 맹점을 가지고 있는 이중적 기호이다.               


내가 부서에서 청소년 나눔 교육을 맡아 처음 한 일은 그 전까지의 교육 횟수는 고정하되 참여인원은 대폭 축소하는 일이었다. 학급 단위로 했던 나눔 교육을 동아리 단위로 설정해, 전체 학급이 아닌 소규모 동아리 친구들과 단계별 주제로 일 년 동안 지속적으로 만나는 다회기 형태로 바꾼 것이다. 그러자 단순한 주제 전달을 넘어 학생들과 직접 기획을 하고 실행하고 평가까지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열리게 되었다.       

        

청소년 교육을 이런 형태로 바꾸게 된 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청소년기의 학생들은 대부분 낯가림이 심해 아무리 참여 방식의 수업을 구성해도 쑥스러워하며 활동을 기피하기 때문이다. 아이스 브레이킹을 위한 게임을 준비해 가도 그 게임을 하기 위한 아이스 브레이킹이 다시 필요할 정도이니 말이다. 일회성이 아니라 여러 번 만나는 것으로 교육방식을 바꾸고 상호 관계성을 점차 확장하자 수줍어하던 친구들과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한 사례를 들자면, 공정무역 주제 교육을 할 때 ‘바나나 게임’이라는 활동을 하는데 바나나 생산자부터 대형마트 주인까지의 공급 벨트 안에서 학생들이 직접 역할을 맡아 공정한 수익을 배분하는 일종의 롤 게임이다. 단회기 안에서 해당 활동을 했을 때 학생들은 개별 역할에 대해 감정이입을 어려워하거나 토론 시 상대방에게 발언을 미루는 경향이 많았다. 그러나 다회기 안에서는 사전에 몇 차례씩 관련 주제를 들어 내용이 익숙하고 상호 간 관계성도 높아져 더 적극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심지어 수업 종료 종이 울려도 도저히 토론을 멈출 수 없을 만큼 친구들은 감정을 이입해서 불공정한 무역의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했다.            

   

물론 이런 방식이 교육의 확장성을 어떻게 담보하느냐고 물을 수 있다. 나 역시 이 선택이 옳다고만은 믿지 않는다. 다만 확장성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지 않을까 생각할 뿐이다. 최대한 텃밭에 많은 씨를 뿌려 수확률을 높이는 방식도 있지만, 일정 기간 공들이고 보듬어 수확률을 높이는 방식도 있을 수 있다. 또한 나는 특히 교육의 확장성 부분은 진행 단체나 기관이 전적으로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소통한 교사들과 학생들에게 일정 부분 맡겨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교육은 그 이후의 상호 소통 과정 또한 중요하다 할 수 있다. 요즘은 여러 비영리기관에서도 성인 실무자 교육이나 교원연수, 청소년 동아리 후속 모임 등에 지속적인 관여를 점차 확대해가고 있는 추세이다. 아마 관계의 상호작용이 주는 효과를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영리단체로서의 교육적 역할         


내가 주로 진행하는 청소년 나눔 교육은 새 학기 시작 즈음 부서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을 받고 동아리 담당 선생님과 논의해 최종적으로 한 해 동안 교육을 진행할 학교가 선정이 된다. 공간과 상황이 서로 다르기에 첫 교육을 시작하는 날은 여러 가지 감정으로 조금은 떨린다. 학생들이 내가 준비한 활동에 잘 반응할까? 주제 전달 방식이 딱딱하지는 않을까? 교육 시간이 남거나 부족하지 않을까? 긴장감이 들 때는 교육을 하러 간다기보다는 도시락을 배달하러 간다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그저 밥을 먹는 것처럼 아이들을 만나자고. 예전에 먹었던 밥과 찬이 당장은 명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지금 나의 피와 살로 남아 있는 것처럼, 이런 경험을 했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적으로 체험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조금은 느슨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100을 들고 가서 70만 주고 돌아와도 나는 굉장히 성공한 교육이라 생각한다. 아니, 오히려 그 30의 여유분이 교육의 질을 담보한다고 믿는다. 정작 배움의 영역에서 중요한 것은 단선의 내용보다는 복선의 반응이다. 그런 상호 간 반응을 기반으로 관계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 관계를 다리 삼아 학생들은 더 높은 학습의 영역으로 오를 것이다.              

 

최근 들어 통섭과 융합, 연계 학습의 중요성이 대두되는 이유도 그것이 지식 획득 과정 차원에서도 유의미하다는 것이 알려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백이 있는 교육 콘텐츠, 공백이 있는 교육공간 속에서 정신도 육체도 기를 펴고 생기를 찾을 수 있다. 내가 비교우위의 지식을 줄 수 있는 존재이고, 효율의 측면에서 아이들에게 반응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나는 철저히 구도 안의 교수자로서 학습자와 저만치 외따로 머물 수밖에 없다.               

비영리단체 교육부서에 일하며 잠시 아이들을 만나는 나는 다만 그들의 삶에 스치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러한 일상이 우리의 개별적 삶을 그물코처럼 연결해주고 있다. 학생들이 성장과정 중에 스칠 많은 사람들과 많은 문제들, 그 가운데 나와 함께 이야기 나눴던 것이 문득 떠오른다면 그들은 그것에 조금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관계할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은 또 체험과 앎의 영역으로 그들을 인도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조금씩 덧대어가는 것이 비단 아름다운 미술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뿐만은 아닐 것이다.        


             



(해당 글은 격월간 대안교육 잡지 '민들레' 2018년 4월 호에 수록된 기고문 임을 밝힙니다. 약간의 내용 수정 과정을 거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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