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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꿈 Jul 21. 2020

좀비물이 말하고자 하는 것

현실의 인간은 좀비가 아닌 자신과 투쟁하는 존재이다

코로나19사태로 인해 심각하게 위축되어 있던 국내 영화 시장에 모처럼 활기가 돌고 있다. 영화 <살아있다> 지난 6 말부터 현시점까지 180 관객을 모으며 꾸준한 성적을 내고 있고, 천만 관객 영화 <부산행> 후속작으로 알려 있는 <반도>까지  개봉해 기대에  관객들을 극장으로 불러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화제가 되고 있는 두 작품 모두 '좀비물'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제 새로울 것도 없이 좀비물은 세계 공통적인 인기 문화코드로 자리 잡은 지 퍽 오래되었다. 비단 영화 영역뿐만이 아니라 넷플릭스 드라마 순위에서도 좀비물은 상위권에 랭크되어 있다.


많은 이들은 왜 이토록 좀비물에 열광하는 것일까? 관련 여러 사회학적 논의가 있겠지만 개인적인 측면에서 해당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다시 영화 이야기이다. 영화 <더 퍼지>는 독특한 스토리 설정을 가지고 있다. '사상 최저 실업률과 범죄율을 자랑하는 가상의 미국,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단 하루 12시간 동안 어떤 범죄도 허용되는 '퍼지 데이'가 있기 때문'이라는, 말 그대로 완벽한 사적 욕망 분출을 국가가 용인한다는 것이다. 다소 극단적인 소재일 수 있으나 그와 비슷한 일탈 허용 형태가 사회제도 속에 없지는 않았다. 바로 고대 그리스부터 로마 시대까지 이어진 '디오니소스 축제'이다.


고대 그리스 3대 비극작가로도 알려진 에우리피데스의 작품 <바쿠스의 여신도들>을 통해 디오니소스 축제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디오니소스 신을 추종하던 여성들이 집과 가족을 버리고 문명을 떠나 산을 오르다 술에 취해 황소를 갈기갈기 찢고, 피가 뚝뚝 흐르는 날고기를 먹는 모습은 광란의 축제와 다름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축제가 오랜 기간 이어지며 사람들 사이에서 컬트적인 지지를 받고 허용되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해당 축제가 사회적인 긴장감을 완화시키는 기능을 일정 부분 수행했기 때문일 것이다(디오니소스 축제의 출발이 여성 커뮤니티 중심으로 진행되었다는 것도 당시 여성의 낮은 사회적 지위를 고려할 때 퍽 의미심장하다). 다시 말해 국가가 용인하는 것은 다분히 예측 가능하며, 예측 가능한 것은 통제 또한 가능하다. 이에 통제가 가능한 무질서 속에 개인과 집단의 일탈을 허용하게 되면 높은 긴장에 의한 우발상황을 관리할 수 있게 된다. 즉 이처럼 일시적 무질서가 장기적인 사회질서에 기여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측면이 존재하는 것이다.


상을 돌아보았을  좀비물의 인기 요인  일부는 우리의 무의식 속에 숨겨진 몇몇의 욕망과 닿아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첫 번째 욕망 키워드는 바로 '무정부적 혼돈(disorder)'이다. 이것은 자신에 대한 자유 욕구와 닿아 있다. 좀비 바이러스의 확산이라는 압도적 재난 앞에 국가나 사회는 기능을 잃게 되지만, 동시에 그 힘의 공백 속에 인간은 다시금 자연으로 돌아가 해방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생존이라는 이름 앞에 기존의 질서는 무시된다. 더 이상 법과 질서를 들이밀 통제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 욕망 키워드는 바로 '집단학살(massacre)'이다. 이것은 타인을 향한 통제 욕구와 닿아 있다. 좀비라는 대상은 우리 안의 타인을 완벽히 제압하고 싶은 우월한 힘과 권력에 대한 욕망, 생과 사를 결정할 수 있는 신적 권위의 욕망을 대리한다. 좀비는 인간과 비슷하되 인간과는 다른 존재이다. 그렇기에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질문 없이 죽음에 대한 당위성을 획득한다. 이것은 인간끼리 다투는 전쟁과는 전혀 다른 양상인 것이다.


우리 안에 이러한 감정이 일면 숨어 있을까? 쉽게 일반화하여 답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자유와 통제 욕구를 부정할 때 인간들이 모여 구성하는 이 세계를 명확히 설명해내기 어려워지는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다소 비약일지는 모르겠으나 좀비물이 대중들에게 인기를 끄는 이유가 '일탈과 해방을 꿈꾸는 인간의 욕망이 극단적으로 그 안에 표출되기 때문'은 아닐까 짐작해 본다. 욕망 통제 사회일수록 해방의 콘텐츠가 대중들에게 인기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이 유토피아적 광장으로 드러나건 (영화 <1987> ), 디스토피아적 밀실로 드러나건 (영화 <기생충>) 말이다.


현실의 인간은 좀비가 아닌 바로 자신과 투쟁하는 존재이다. '나'는 하루하루 수많은 개인적 욕구를 억누르며, 동시에 도무지 욕구를 알 수 없는 무수한 타인들과 관계한다. 도무지 욕구를 알 수 없다는 의미에서 타인은 나에게 그리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존재들이다. 다만 '결정적 상황'이 발생하고 개개인의 욕망 통제 영역이 붕괴되었을 때 타인의 정체는 그제야 비로소 나에게 드러난다.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좀비보다 더 악랄해지는 개인이 있는 반면,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거는 이들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좀비물은 추상적 자유와 일탈의 해소를 넘어 보다 구체적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도 싶다.


이러한 재난의 상황 속에서도 부디 당신은 끝까지 인간의 얼굴과 모습으로 살아 남아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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