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러시아 월드컵 기간 동안 전 세계가 축구 열기로 뜨거웠다. 세계 축구팬들의 대규모축제이자 거대자본이 쏠리는 대형산업이기도 한 월드컵을 바라보는 시선은 관점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경기장 내외에서 펼쳐지는 인종차별적 발언과 행위를 예로 들어 월드컵이 국가주의·민족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편협한 행사라는 다소 비판적인 의견도 있고, 동시대의 공통경험을 쌓아 사회를 응집시키는 힘을 얻는다는 긍정적 의견도 있다. 파편화된 현대사회에서 그러한 신뢰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회적 비용이 필요한데 월드컵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월드컵을 바라보는 관점은 사람마다 다양하지만 나의 경우, 축구 경기 안의 감독과 선수의 모습 속에서 교수자와 학습자의 모델을 발견하는 것에 그 관전 포인트가 있다. 스타 플레이어가 없는 다소 주목 받지 못한 팀이 준비기간 통해 감독과 선수가 합을 맞춰 놀랄 만한 결과를 가지고 오는 경우나, 뒤지고 있는 경기를 순간 순간 팀 전술 변화를 통해 뒤집는 장면은 축구를 즐기는 커다란 쾌감 중 하나 일 것이다. 이처럼 잘 짜인 전술로 멋진 경기를 보여주는 팀을 운용하는 축구감독을 보며 좋은 교수자란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 좋은 학습조력자(퍼실리테이터)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참여학습과 퍼실리테이터
가까운 교사들이나 강사들의 하소연에 따르면 교육현장에서 학생들의 반응을 끌어내는 것이 날로 어려워진다고 한다. 학생들이 너무 무관심하거나 반대로 너무 많이 알고 있어 수업 내용에 별다른 반응이 없다고 한다. 교실이 어느덧 호기심이 사라진 공간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궁여지책으로 ‘참여학습’에 관심이 쏠리게 되었고, 한동안 여기저기서 퍼실리테이션 열풍이 불었다. 퍼실리테이터 (Facilitator란, 쉽게 하다, 용이하게 하다, 촉진하다의 의미인‘Facilitate’에서 온 말로 개인과 환경 안에서의 학습촉진자, 학습조력자Learning Facilitation를 뜻한다) 양성과정이나 퍼실리테이션 워크숍 등의 이름으로 현장 적용할 수 있는 다양한 참여도구나 기법을 알려주는 프로그램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내가 여러 학교에서 진행하는 나눔교육 또한 참여학습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나의 경우, 그러한 교육 도구와 기법들은 정작 현장에서 도움이 되지 못했던 때가 많았다.
일단 학급의 분위기와 학생들 간의 관계성이 개별 현장마다 다 다르고, 사전에 인지하고 있는 정보나 경험치가 다르며, 학습 공간이나 기타 상황적인 변수가 각각이기에 똑같은 도구와 기법을 모든 상황에 적용하기는 어려움이 따랐다. 또한 나도 그 모든 것을 바르게 적용하기에 그 짧은 워크숍만으로는 훈련되지 못했고, 내용 전달에만 매몰되있어 참여를 원치 않는 학생들에 대한 대처방식의 노하우 등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학생들이 좀 더 적극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선행활동이 추가적으로 필요했고, 무작정 질문을 던지기보다 질문을 둘러싸고 있는 내용을 먼저 설명했어야 했다.
참여학습은 단순히 학습자가 참여해 재밌게 이끌어가는 수업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반영하고 있다. 교수자와 학습자의 역할과 권력방식에 대한 변화가 그 핵심이라 할 수 있는데, 기능이나 방식, 기술을 전수하는 기계론적 인간관에 따른 가르침에서 벗어나 학습자 내부에 있는 문제해결력과 잠재적인 가능성을 끄집어내고 새로운 인식과 통찰을 가져다주는 교육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참여학습은 브라질의 교육자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의 해방교육이론과 영국의 개발학자 로버트 챔버스Robert Chambers가 제안한 지역참여평가(Participatory Rural Appraisal,PRA 제개발협력분야에서 해당 지역의 문제를 지역주민들이 직접 조사하고 탐색하여 해결점을 찾기 위하여 고안된 방법으로 다양한 시각적 도구와 참여기법을 활용한다. 이때 퍼실리테이터는 도움을 주는 촉진자나 조력가로서 문제해결에 부분적으로만 참여해야 한다)가 결합되어 완성된 이론으로 90년대 초반, 국제빈곤퇴치단체 액션에이드ActionAid를 통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프레이리가 말하는 교육은 민중이 현실에 대한 침묵을 깨고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정’이다. 그는 이러한 교육을 통해 개인이 변화하고 무엇보다 사회의 구조가 변화해야 한다고 보았다. 프레이리가 주장했던 ‘프락시스praxis’는 자신과 세계의 문제를 아는 과정, 이것을 더욱 심화시키는 과정, 실천적 행동의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은행 저금식’의 주입식 교육을 벗어나 학습자 스스로의 답을 찾아가는 ‘문제제기식’ 교육을 추구했다.
참여학습에서 교사의 역할은 일종의 ‘퍼실리테이터’로서 학습자의 문제 해결을 위한 결정과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퍼실리테이터의 역할은 학습자 중심의 교육을 기획하고 학습자들의 경험을 공유하도록 독려하며, 다양한 참여형 교수법을 적용하는 것이다. 더불어 과정 안에 적절한 동기부여, 목표 달성을 위한 명확한 가이드, 개별 커뮤니케이션 및 창의성 촉진, 경청의 태도 또한 동반되어야 한다. 즉, 참여자들 간의 집단지성과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 최적의 프로세스와 환경을 준비하고 진행을 돕는 이라 할 수 있다.
축구계에서도 과거에는 강력한 카리스마형 지도자가 주목을 받았지만 점차 퍼실리테이터형 감독이 그 결과물을 만들어 내고 있다. 선수 개개인이 경기장 안에서 어떻게하면 신명나게 자신의 플레이를 유지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분석하고 조력하기 위해 감독은 개별 선수들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 선수의 기술적 역량뿐만이 아니라 개인 성향 및 신체적 능력까지 체크해야 한다. 선수 특성을 확인한 후에는 부족한 부분을 별도로 채우고, 위치 선정 등 자신의 역할에 대한 가이드를 명확히 해주는 것도 감독의 역할이다. 축구는 집단 게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개별의 게임이기도 하다. 그래서 현대 축구는 디테일이 그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감독의 중요한 역할은 선수들과 함께 전체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이다. 선수들의 동기부여, 갈등 관리, 팀 전술 작업 등을 통해 하나의 비전을 위한 공동체로서 공통경험(승리, 성장 등)을 조금씩 단계적으로 성취할 수 있게 돕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적용 단계에서 잊지 말아야 것이, 바로 팀 전술 및 운영은 현 상황의 자원을 중심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몇몇 국가나 클럽들의 실패 사례를 돌이켜보면 갑자기 유명한 다른 팀의 전술이나 운영방식을 흉내 낸다고 그런 성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과거 FC바르셀로나나 스페인 국가대표팀이 주로 사용했던 ‘티키타카’전술(탁구공이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짧은 패스를 주고받으며 경기를 풀어나가는 전술 방식)은 패싱 능력이 있는 미드필더 라인이 구축된 후에 적용하는 것이지 해당 전술이 유행한다고 그대로 따라하다가는 개별 선수의 능력도 잃고 좋은 경기도 할 수 없게 된다. 기본적으로 보유한 선수들에 대한 깊은 이해를 중심으로 이뤄낸 공동의 비전이 결국 팀 전술이 되는 것이지, 그 선후 관계가 뒤바뀌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배움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결국 퍼실리테이션이란 기술이 아닌, 태도의 영역이다. 다양한 참여 기술을 늘어놓고 취합된 정보를 학습자가 결정해버리면 그것을 참여학습이라 말할 수 있을까? 핵심은 의견의 소통과 반영이고 그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수업요소 중 하나일 것이다.
미래의 교사 모델은 정보전달자가 아닌 학습조력자가 될 것이라고 한다.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인해 기존의 교과 내용을 전달하던 교사의 역할은 많은 부분 대체될 것이다. 앞으로 교사는 학습자 간의 다양한 정보들을 융합 및 통합을 조성하고, 해당 내용에 대한 토론을 주제하며, 개별 비계를 설정하고 맥락을 연결해주는 역에 더 초점이 맞춰질 것이다.
의견이 수렴되고 결정되는 과정은 지난하다. 교수자가 개입하면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다는 것도 스스로 알고 있다. 그러나 학습조력자는 그 과정을 기다리고 받아들을 수 있는 마음, 그들이 결국 답을 찾아갈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이상은 자신과 자신의 권력을 내려놓는 소중한 과정이기도 하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영역을 방관하라는 것은 아니다. 도달하고자 하는 명확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필요시 적극적으로 독려해나갈 필요가 있다. 축구감독이 당일 전술마저 선수들에게 짜라고 한다면 그것은 직무유기일 것이다. 그들에게 맞는 전술을 제안하고 적용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니 말이다.
나는 이러한 기다릴 줄 아는 마음을 학습조력자가 보유해야 하는 능력 중 가장 우선으로 꼽고 싶다. 학생들 앞에서면 전달자로서의 강박이 먼저 든다. 하지만 ‘전달’이라 함은 단순히 내 입에서 쏟아지는 말을 이르는 것이 아닌, 그것을 듣는 상대방의 이해를 통해서 완성되는 것이다. 참여학습이 아무리 의미 있다 하여도 기다림을 전제로 적용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학습조력자는 학습자에게 질문을 던지되 오히려 그 답을 유보하는 역할에 가깝다. 기계적으로 해답을 획득해 나가기보다는 학습자 스스로 질문을 곱씹게 만드는 것, 그것을 통해 다시 세계를 향해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하는 것.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작은 축구 클럽의 감독이라 할지라도 팀 선수들에게는 넓은 세계무대를 꿈꾸게 해야 하지 않을까? 이번 월드컵을 보며 50분 동안의 멋진 플레이가 이루어지는 교실을 꿈꿔본다.
(해당 글은 격월간 대안교육 잡지 '민들레' 2018년 6월 호에 수록된 기고문 임을 밝힙니다. 약간의 내용 수정 과정을 거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