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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꿈 Oct 23. 2020

사회적경제 이야기

새로운 시민권력의 가능성

'사회적경제'란 무엇일까요?


최근 이곳저곳에서 사회적경제에 대한 논의가 많아진 것 같습니다. 심지어 지하철 광고에서도 사회적기업이라든지 협동조합에 관한 정보를 마주하고는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사회적경제'라는 단어는 생경하게 느껴지리라 생각됩니다. 실제로 그 누구든 이를 쉽게 언급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사실 사회적경제는 생각보다 범위가 넓고 역사적인 맥락까지 고려한다면 여러 층위의 논의가 가능하거든요.


그래서 이번에는 사회적경제에 이제 막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신 분들을 위해 가볍게(?) 사회적경제를 둘러싼 배경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내 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드린 대로 사회적경제에는 다양한 관점이 존재함으로 이하의 내용들은 철저히 제가 바라보는 사회적경제의 모습임을 밝힙니다. 다만 해당 내용이 여러분이 이후 사회적경제 개념들을 두루 살필 때 작은 참고가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네요.



‘사회적경제’ 라는 용어는 언제 사용하게 되었을까요? 알아본 바로는 1830년 프랑스의 경제학자 뒤누와이에(C, Dunoyer)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뒤누와이에가 언급한 사회적경제는 지금의 사회적경제와는 사뭇 다를 것입니다.


사실 사회적 경제라는 개념은 역사의 발전에 따라 그 의미가 변해 왔으며,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18세기부터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으로 등장했다가 20세기에 들어 경제부문으로 많은 부분 축소되어 언급되었어요. 그래서 현재 사회적경제는 일반 영리기업과 다른 운영방식을 가지는 부문으로 규정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김신양, 한국사회적경제의 역사).


이에 현재의 사회적경제에 대한 의미를 경제용어 사전을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사회적경제(Social Economy) : 공동이익과 사회적 가치의 실현을 위해 사회적 경제조직이 상호협력과 사회연대를 바탕으로 사업체를 통해 수행하는 모든 경제적 활동(한경 경제용어 사전).


이상을 좀 더 압축적으로 논하자면 


사회적경제란, '사회적 목적과 민주적 운영원리를 가진 호혜적 경제활동'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세부 영역에는 '사회적기업', '협동조합', 마을기업', '자활기업'이 있습니다.


출처: 구로사회적경제통합지원센터


사회적경제라는 개념이 어느 한순간 뚝딱 세상에 나온 것은 당연히 아니겠죠. 당연히 이쪽 방면의 선구자들이 존재합니다.


영국 산업혁명 시기 최초의 실천적 비판가인 '로버트 오웬(Robert Owen)'은 협동조합운동의 창시자로도 알려져 있어요. 그는 농공일체의 협동조합사회 건설을 목표로 실제로 '협동촌'을 만들기도 했죠. 오웬의 사상은 노동조합 운동, 협동조합 운동에 강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 사회적경제 영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 중에 하나가 바로 '칼 폴라니 (Karl Polanyi)'이죠. 그가 1900년에 발표한 <거대한 전환>이라는 책은 사회적경제영역의 바이블처럼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19세기적인 시장 경제를 ‘토지ㆍ노동력ㆍ화폐의 상품화’라는 픽션상에 성립한 사회에서 돌출한 이상한 시스템이라고 비판하며 그 문화 파괴적인 성질을 명확히 하고 경제를 사회로 되돌려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였죠.


더불어 '상호부조 사회'를 꿈꾸었던 초기 아나키스트들의 저작도 살펴볼만해요. 러시아의 크로포트킨(P,Kropotkin)이 쓴  <상호부조론>도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죠.


출처: 장원봉 (2006)


현재 사회적경제는 왜 이처럼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조금은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기존의 역사적 흐름 안에서 '국가와 시장의 실패'라는 현실 가운데서 사회적경제는 일종의 대안경제로 인식되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위의 표에서 확인하실 수 있는 것처럼 시장의 실패로 인해 노동시장이 붕괴되며 대규모 실업이 늘어났고, 국가의 실패로 인해 국가 서비스는 부에 의해 차등되기 시작했죠. 그 안에 사람들이 피폐해질 수 밖에는 없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국가와 시장을 넘어 다른 중간 영역을 발견한 것이 사회적경제입니다. 나름대로 블루 오션 같은 것으로 보였던 것이지요. 


하지만 실제 사회적경제의 역사는 이처럼 최근에 발견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존속과 꾸준히 함께 하였습니다.


이에 저는 지금 언급한 '대안경제'나 '중간경제'로서의 사회적경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사회성을 중심으로 그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대안경제나 중간경제의 논의는 그  포커싱이 '경제'로 집중되어 있으나 다시금 그 영역을 '사회적'에 방점을 찍어야 하고 그것이 우선시되어야 하나의 공동 운동으로써 사회적경제가 건강히 자리 잡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인 것입니다.

이상의 설명을 위해 어려운 단어로만 느껴졌던 '사회적경제'라는 합성어를 '사회'와 '경제'로 분리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사회의 사전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사회: 일정한 경계가 설정된 영토에서 종교 ·가치관 ·규범 ·언어 ·문화 등을 상호 공유하고 특정한 제도와 조직을 형성하여 질서를 유지하고 성적 관계를 통하여 성원을 재생산하면서 존속하는 인간집단(두산백과).


경제에 대한 사전적 의미도 함께 살펴볼까요?


*경제: 인간의 공동생활을 위한 물적 기초가 되는 재화와 용역을 생산, 분배, 소비하는 활동과 그것을 통하여 형성되는 사회관계의 총체(한국민족대백과).


이렇듯 '사회'와 '경제'를 따로 생각해보면 이상은 인류의 태생과 함께 존재한 것이며, 이 둘은 이미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도 합니다. 집단화된 인류는 자연스럽게 구성원들 간의 ‘사회’를 구성하고, 이처럼 조직화된 사회는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거래 형태에서 ‘경제’의 영역이 점차 중요해졌어요. 이것은 곧 인류의 존속에 관련된 영역이었던 것이죠.


그렇기에 사실 ‘사회적 경제’는 우리에게 전혀 생소한 개념은 아닙니다. 


고대의 공동체 안에서는 가장 먼저 ‘먹고사는 것’이 중요했어요. 문명이 발달하기 전에는 자연과의 투쟁 상태였으니까요. 그러니 자연스럽게 사회 안에서 요구되었던 것이 부족 안팎의 호혜들이었을 것입니다 (예: 북미 및 남태평양 원주민의 문화 ‘포틀래치(potlatch)’ ).



그러나 역사의 발전과 함께 사회분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죠. 매우 슬프게도 혹은 낙관적이게도 낯선 이(타자)들을 하나 둘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또한 자본의 흐름과 발전에 영향을 주게 되죠. 이제 인간은 더 이상 호혜성으로만 살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출처: leene & schuyt (2008)


사회분화와 함께 등장한 것이 계급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며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 국가 체제가 완성되죠. 현대국가는 여러 가지 논의 가운데 있지만 (유럽형)복지국가의 지향으로 넘어가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국가 시스템이 필요하겠죠. 그렇다면 우리는 ‘새로운 국가’를 발명하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요? 그에 따른 국가의 종속의 문제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가 묘사한 ‘리바이어던’과 같은 강력한 권한과 힘을 독점하고 있는 국가를 어떻게 통제해야 할지 많은 이들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출처: 홉스, <리바이어던> 표지

사회를 조정하는 또 다른 선택으로 교환중심의 시장이 발전하게 됩니다. 이러한 거래 중심의 발전 기저는 바로 ‘신뢰’이겠죠. 신뢰가 있어야 교환이건 화폐 건 통용이 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거래적 신뢰, 계약적 신뢰라는 것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상의 신뢰 앞에 전제가 붙습니다. 그것은 동일한 이해관계 혹은 계약서, 법과 같은 공통의 ‘라운드 테이블’ 안에 있을 때에만 신뢰구축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어떠한 의미로 다소 냉정한 관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다시 우리의 일상생활영역으로 시선을 바꾸어 보겠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상의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해야 할까요? 생명과 안전은 국가에서 공급이 가능합니다(사회계약). 또한 물질적 풍요는 시장에서 공급이 가능합니다(성문계약). 그러나 우리의 생활에 꼭 필요한 정신적 안전과 풍요는 어디에서 공급받을 수 있나요? 인간이 타인과 함께 누리는 ‘믿음’은 어디에서 교환 및 획득이 가능한 것일까요? 


고대사회를 되돌아보아도 우리가 타인에게 대응하는 ‘호혜’의 바탕은 사회 따로 경제 따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묶여 있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 두 개가 바탕으로 호혜가 일어나는 것이죠. 관계와 물질이 외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회자되는 대안경제로서의 사회적 경제를 상호 분리하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제가 생각하는 ‘사회적경제’는 오히려 인간의 근원적인 심리기제에 가깝거든요. 해서 사회적경제에 대한 논의는 호혜를 중심으로 한 인간성의 회복 (혹은 인간의 능력에 대한 회복),  사회적 안전망의 구축, 더 나아가 국가와 시장 중심이 아닌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꿈꾸는 작업이기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이 그의 저서 <세계사의 구조>를 통해 제시하는 오늘날의 과제는 교환양식을 통해 새로운 사회구성체와 세계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재분배에 의해 부의 격차를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호혜’라는 교환양식의 고차원적인 회복을 통해 애초 부의 격차가 생기지 않는 교환적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핵심인 체제입니다. 


곧 ‘증여’가 가진 힘을 되살려, 격차를 낳는 교환시스템 자체를 폐기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라타니는 이런 맥락에서 소비자-생산자 협동조합, 지역통화·신용 시스템같이 교환양식을 다루는 ‘유통과정’에서 자본에 대항하는 움직임들을 새로운 사회구성체를 만들기 위한 운동으로 주목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바꾼다는 것. 언젠가 누군가는 그것을 투쟁이나 혁명의 이름으로 실현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역사를 살펴보아도 국가나 시장은 민중으로부터 빠르게 그 권력을 빼앗아갔죠. 


그래서 사회적경제는,


독점적 권력은 스스로 포기하나,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은 물론이고 사회적 생활도 경제적 생활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선언적 시스템이자 사회통제(시민 권력)의 가능성에 대한 구상이기도 합니다.


사회적경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존재선언과 닿아 있으며, 더불어 끊임 없이 권력과 이익만을 확장해 가지 않겠다는 스스로에 대한 제어적 기능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이에 우리는 ‘사회적경제’라는 이름으로 사회와 경제, 그 중 일부가 아닌 그 모두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새로운 시민권력의 등장은 이처럼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주머니 속, 아주 작은 호의와 배려를 통해 조금씩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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