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으로써의 교육의 의미와 그 단계적 구성
(해당 내용은 외부 포럼 발제문을 옮겼기에 기존의 포스팅 내용과 다소 중복되는 설명이 존재합니다.)
현재 다양한 비영리단체에서 여러 주제와 형태로 학교 안팎 교육활동이 진행되고 있다. 다소 제한적인 공교육 커리큘럼 안에 이처럼 다양한 담론들이 확대되는 것은 충분히 환영할 만한 일이다. 비영리 단체의 업무 전문성을 통해 학생들에게는 사회의 다양한 측면을 돌아보며 그 사례를 폭넓게 접할 수 있는 이점이 있고, 학교 측에는 자유학기 및 체험, 동아리 활동에 기댈 수 있는 교육 파트너를 얻을 수 있으며, 단체 또한 자라나는 세대에게 기관의 가치와 사업을 지속적으로 안내해야 할 필요가 있기에 상호 유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비영리단체의 교육 형태를 세세히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학교 안에서 진행하는 교육 프로그램은 다소 제한적인 상황도 있으리라 유추된다. 학교라는 공간적 한계, 물리적인 시간의 한계, 운영되는 학사 프로그램 일정의 한계 등의 이유 때문이다.
그렇기에 현재의 비영리단체의 교육은 단체나 학교 양쪽 모두 만족스럽지 못한 채 보조적 기능으로 활용될 수밖에 없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실제 교육을 위해 진행 비영리단체에서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두 가지 정도일 것이다. 첫째는 진행 단체에서 추구하는 교육 방향과 단체의 목적성에 맞춰 제한적으로 대상을 선발하여 운영하는 것, 둘째로는 학교에서 요청하는 형태의 다소 안전한(?) 교육 프로그램을 그에 맞게 구성해 진행하는 것이다.
물론 두 가지 선택 모두 아쉬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단체의 목적을 강조하다 보면 보편성에 대한 문제가 발생하며, 교육의 목적성 자체가 교육이 필요한 이들을 위한 보편 교육이 아닌 심화 형태로 이루어져 자칫 엘리트주의적 교육으로 비칠 우려도 있다.
반대로 학교 측에서 요청한 안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에도 의구심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현실적인 공간과 시간의 제약으로 해당 교육이 다소 인지 중심의 교육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실천과 활동은 다 공간과 시간을 기반으로 해 적잖은 에너지가 소요된다. 현실적으로 그것을 투자할 수 없는 상황적 이유가 현장에서는 여럿 발생한다.
교육을 인간의 행동양식(가치관, 태도, 지식, 사고, 성격 등)을 계획 또는 의도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할 때 결국 교육이란, 학습자의 태도 변화에 목적을 두고 있다. 교육의 목적이 ‘알고 있음’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
현재 한국사회 안에도 수많은 ‘알고 있음’이 있다. 미디어나 매스컴과 다양한 전문가들은 우리에게 ‘앎'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도덕적 앎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점점 더 각박해지고 있다고들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그 역시 앎을 넘어선 실천의 부재 때문이리라 생각되어진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나는 농구를 잘하고 싶다. 특히 3점 슛을 잘 넣고 싶다. 그래서 나는 신체 역학과 근골격에 대한 분석을 하고 완벽한 각도를 논문을 보며 연구했다. 이처럼 이론으로 무장하더라도 코트에서 슛을 쏘면 들어가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높을 것이다. 게다가 실제 시합이라면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변수는 이론적으로는 계산되지 않는다. 결국 슛을 잘 쏘는 방법은 반복적인 경험을 통해 사례가 구성되고 유형이 정리되는 과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3점 슛을 잘 넣으려면 일단 들어가건 안 들어가건 슛을 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작 배우고자 하는 이들을 어떻게 코트까지 다다르게 할 수 있을까?
이상의 답을 찾아가는 실마리를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 1921~1997)를 통해 알아보자.
브라질의 교육학자인 파울로 프레이리가 말하는 교육은 민중이 현실에 대한 침묵을 깨고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과정’이다. 이러한 교육을 통해 개인이 변화하고 무엇보다 사회의 구조가 변화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가 주장했던 ‘프락시스(praxis)’는 자신과 세계의 문제를 아는 과정, 이것을 더욱 심화시키는 과정, 실천적 행동의 과정으로 구성된다. 구체적인 교육방식의 변화로써 ‘은행 저금식’의 주입식 교육이 아닌, 학습자 스스로의 답을 찾아가는 ‘문제제기식’ 교육으로의 이행을 촉구하였다.
즉, 프레이리가 말하는 ‘프락시스’를 과정적이며 단계적으로 정리해보자면
<‘참여’를 통해 ‘경험’이 생기고 그 과정 안에 ‘비판적 성찰’이 이뤄지고 그것이 ‘동기부여’가 되어 ‘실천’까지 이르는 행위>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분할적인 단계가 아니라 하나의 사이클과 순환을 이루며, 과정 중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다.
(성찰과 행동의 간격에 대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학자들도 있다. - 하단 표를 참고)
경험과 성찰이 실천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사이클에 대한 다른 예를 살펴보자.
비고츠키는 러시아 혁명기에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러시아의 심리학자, 교육학자이다. 러시아 혁명 바로 직후, 비고츠키와 그의 제자 루리야는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지아의 오지를 방문했다. 그들은 당시 진행 중인 사회 변혁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들과 집단농장과 문해 과정의 결과로 프레이리적 의미에서 ‘주체’로 성장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태도의 차이에 놀랐다. 새로운 사회적 교육적 경험이 부족한 사람들은 대화에 뛰어들기를 주저하며 비판적 존재로서 토론에 참여하기를 꺼렸다. 그 마을 바깥세상의 삶에 관해 방문자들에게 질문해보라고 했을 때, 그들은 다음과 같이 반응했다.
“어떤 질문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뭘 아는 게 있어야 질문을 하죠. 우리가 아는 것이라곤 밭에서 괭이로 잡초를 제거하는 일뿐입니다.”
그러나 혁명의 변혁 과정에 참여했던 농부는 그들의 집단적인 삶에 관해 많은 질문을 했다.
“어떻게 하면 삶이 나아질까요?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나는 이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사물들은 어디서 오는지, 왜 부자들은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지는지 궁금합니다.”
참여를 통한 비판적 성찰은 무언가를 변화시킬 수 있는 행동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폭발력을 지닌다.
현장에서 학생들을 만나면 사실 내가 주로 진행하는 주제 교육(나눔&윤리적 소비&세계시민 등)에 대한 내용은 기계적으로는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언제나 그 실천이 어렵다. 실천이 어려운 이유는 해당 문제가 ‘내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것과 나와 우리의 문제로 치환하는 것이 어렵다. 해서 작은 성취동기를 마련하고 충족하는 단계적 방식 또한 필요한 것이다. 나눔 인식도 마찬가지이다. 물질적 나눔보다 먼저 일상 속의 쉬운 나눔( 인사를 나누다, 시간을 나누다, 웃음을 나누다 등)의 방식에 대한 환기를 통해 나눔의 인식을 변화시켜 성공자들의 전유물이 아닌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먼저 경험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이에 비영리 교육단체는 효과적인 비계 설정과 장벽이 높지 않은 참여 경험을 기술적으로 고려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상의 맥락에서 내가 하고 있는 주제 교육 영역에서는 ‘참여학습’을 중요시 여긴다.
참여학습은 앞서 언급한 프레이리의 해방 교육이론과 영국의 개발 학자 로버트 챔버스가 제안한 지역참여 평가(PRA) Participatory Rural Appraisal가 결합되어 완성된 이론으로 90년대 초반, 국제 빈곤퇴치 단체 액션에이드 ActionAid를 통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지역참여평가법은 국제개발협력분야에서 개발 사업의 대상자 지역에 대한 문제들을 탐색하기 위하여 고안된 방법이다. PRA는 저개발국가의 문제를 해당 지역의 사람들이 본인의 문제를 직접 조사하고, 문제의 해결점을 찾아 협력을 할 수 있도록 하여 각자의 역할을 이해하고 평가하여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도록 다양한 시각적 도구와 참여 기법을 반영한다.
이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개발 전문가가 아닌 지역 주민 스스로가 빈곤과 필요를 정의하는데 도움을 주는 촉진자나 조력가(facilitator)이며, 그는 문제 해결에 관해 부분적으로 이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 지역 사람들의 경험에 근거하여 우선적 해결과제들을 정렬하고 외부인은 청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빈곤에 대한 절대적 기준이 가지는 요소들이 실제로 주민들의 체감하는 가난과 소외의 현실을 얼마나 잘 반영하는가에 대한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고안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파울로 프레이리의 교육이론과 로버트 챔버스 교수의 지역참여평가법 모두 학습자 개별이 문제를 인식하고 통찰하여, 잠재적인 가능성이 실현되어야만 새로운 자기 발견으로 이어짐을 중요한 개념으로 보았다. 하여, 참여학습법에서는 상호 간의 질문이 주요한 학습도구로 활용된다. 학습자가 대상 도는 내용에 대해 ‘왜’라고 하는 존재 이유를 질문하면서 학습하는 방법을 배울 때만이 그 타당성을 가진다는 뜻이다.
최근 참여교육에 관한 논문들을 찾아 읽었다. 주로 인성 교육, 세계시민교육 등에 대한 실천적 과제에 대한 내용들이었는데, 그중 세계시민교육 영역의 흥미로운 글 하나를 요약해보고 의견을 덧대 본다.
/ 이하의 글의 일부는 <세계시민성 함양과 세계시민교육의 실천방안: 청소년 참여교육의 활성화를 중심으로 (이윤주, 2016)>의 내용을 축약하였음을 밝힙니다.
최근 교육 현장에서 세계시민교육의 중요성은 나날이 커져가고는 있지만 해당 개념 자체가 추상적이라는 특성으로 막상 실천 영역과 연결하기는 어렵다는 의견이 많다. 해서, 세계시민교육의 능동적이고 실천적인 움직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합리성에 근거한 의무론적 관점에서 벗어나 우연성에 근거한 역사주의적 관점으로 전환이 필요하다.
이상의 논의를 확장하기 위해 미국의 철학자 리챠드 로티의 ‘실천적 연대’와 로이 우드 셀라즈의 ‘우리-의식’을 끌어온다.
세계시민성을 두 가지 관점으로 나눠보자면, 하나는 칸트와 하버마스 등의 학자들로 대표되는 합리성에 기초한 ‘의무론적 관점’과 로티와 하이데거 등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우연성에 따른 ‘역사주의적 관점’이다. 현재 우리가 익히 알고 접근했던 측면이 바로 전자 쪽이다.
그러나 문제는 플라톤이나 칸트적 관점을 그대로 답습하는 합리성에 기초한 의무론적 관점으로 세계시민을 바라보자면 그 존재 자체의 타당성과 옮음을 지니고 있기에 일종의 지향점, 즉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다분히 규범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해당 관점은 인지적인 측면의 이해를 통해 받아들이게 하는 것에서는 공헌을 했지만 실제적 실천, 현실 적용에는 한계를 지닌다.
반면에 우연성에 근거한 역사주의적 관점은 그것을 시대적 상황에 따라 우연적으로 서로가 합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설명한다. 더 이상 세계시민성은 인지적 차원에서 탐구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낯선 사람들을 ‘고통받는 동료’로서 바라볼 수 있는 상상력에 의해서 성취되어야 할 것이라 보는 것이다.
이에 로티는 실천의 영역으로써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에 대한 이론적인 탐구가 아닌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대화이고, 그 대화를 통한 연대를 제안한다. 인류의 연대성은 공통의 진리나 공통의 목표를 공유하는 문제가 아니라 공통된 사적인 희망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공유하는 공감된 태도와 감정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고통의 공감’의 능력을 중요시한 것이다. 연대성의 기본은 다른 인간들을 ‘그들’이 아닌 ‘우리 가운데 하나’로 보게 하는 과정을 통해 낯선 사람들이 어떤지에 대한 상세한 서술과 우리 자신은 어떠한 가에 대한 재 서술의 문제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유사성 찾기가 셀라즈의 ‘우리-의식’과 연결되는데, 그는 단순히 ‘인간 자체에 대한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서 회의하고 인간 자체에 대한 의무를 인지하고 판단함과 동시에 자신을 일깨우는 수단으로써 ‘우리’라는 내집단적 공통성을 지닌 상태의 감각을 확장시키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해당 논의 과정에서 윤리성은 다소 붕괴된다. 세계시민교육이건 인성교육이건 나눔교육이건 그것은 우리는 당면한 생활 영역의 문제이며, 끊임없이 발생하고 해결해야 하는 과정 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래서 구도적 관계적 측면에서 나와 우리를 고통스럽더라도 지속적으로 돌이켜 봐야 하는 것이다. 그 고통의 결과물이 바로 공감일 것이고, 그 공감이 결국 사람을 움직일 것이다. 언제나 우리는 우리가 있는 장소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행동 없는 성찰은 의미 없는 말잔치일뿐이고, 성찰 없는 행동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Freire,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