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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꿈 Jan 15. 2021

문학은 무용한 것인가

공감과 사회 추동으로서 문학의 역할

중국의 대문호 루신 선생은 많은 이들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의술이 아닌 문학이라 깨닫고 의학 공부를 포기했다고 하는데, 요즘의 기준으로 이를 비추어보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판단일 것이다.

우리는 이미 문학이 무용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팬데믹 시기가 아니었더라도 단순히 사회적 영향력으로 따지자면 문학은 의학보다 저만치 뒤에 있을 것이다. 이처럼 무거운 문학적 질문이 사라진 세상에는 오직 ‘웃음’만이 위세를 떨치고 있다. 잠깐의 즐거움을 위해 서로가 서로를 희화화하여 소비하는 세상, 이러한 세상에 문학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또 다른 지식권력의 장으로서 작용하는가? 쉬이 답하기 어려워진다.

솔직히 나는 나의 아이들이 문학과 거리를 두고 살았으면 한다. 독서는 삶을 불행하게 만든다. 그 행위는 타인의 고통에 민감해지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난 아이들이 문학과 가까이 지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음을 안다. 그것이 많은 선구자들이 언급한 ‘가난한 삶의 복’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참으로 애처롭고 초라한 복이다. 그렇지만 신은 그것이 자신이 줄 수 있는 복의 전부라고 말한다.

최근 가슴 아픈 기사들이 눈에 들어온다. 자녀를 키우는 입장에서 맘이 쓰려 차마 해당 뉴스를 보고 싶지도 읽고 싶지도 않다. 세상에는 이처럼 내가 외면한 아픔이 얼마나 많은가?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지 못하면 결코 타인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게 나는 그들에게 저만치 벗어나 있다.

다시금 루쉰 선생을 떠올린다. 그의 말처럼 문학은 여전히 이 세상 속에 유효한가? 이에 대한 서글픈 대답은 무척 단순하다. 우리가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한 훈련과정이 필요하며, 동시에 문학의 유효함은 그 지난함에 있다는 것이다. 글을, 타인의 스토리를 읽어나가는 것은 무척 괴로운 행위이다. 그러나 그것을 오래 곱씹을 때 비로소 진짜 생의 단물이 우러난다.

우리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상대에게 다가간다. 그곳은 영원히 다다를 수 없는 영역이지만 그 거리를 좁혀가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 ‘나와 너’는 기어이 (합일이 아닌)얼굴을 마주 볼 수 있는 공동의 공간을 획득할 수 있다. 그렇게 인류는 조금씩 타인을 새롭게 발견하며 지금까지 이어져 왔던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불행과 고통, 슬픔을 돌아보아야 한다. 성경의 전도서에는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의 세상은 문학이 무용한 세상이 아니라, 그 어느 때보다 문학이 절실한 때가 아닐까? 비록 자본이 그 눈을 가리고 있지만 그 혹독한 싸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 그 우직한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 슬픈 사람들이 이 세계를 삐거덕삐거덕 움직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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