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 다시 돌아 봄
그림 작가 온수와 교육단체에서 일하고 있는 물꿈이 함께하는 [너를 통해 나를] 프로젝트입니다.
'엄마'와 '아빠'라는 서로 다른 역할을 맡고 있는 친구가 만나 아이와 함께 성장하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나눕니다. 멀고 깊은 이야기도, 가깝고 가벼운 이야기도 담습니다.
[너를 통해 나를] 프로젝트는 5월 이후부터 연재를 마무리하고 글과 그림을 다듬어 기록물로 엮어보는 작업을 이어가고자 합니다. 그동안 [너를 통해 나를]에 관심 가져 주시고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훌쩍 한 해가 돌아 어느덧 <너를 통해 나를> 1기를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어린 시절에는 그렇게 더디 흐르던 시간이 나이가 들수록 가속도가 붙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이를 뇌과학적으로 풀어낸 기사를 읽었는데 무지해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어려웠으나 반복된 정보에 대한 뇌의 적응 작용인 것 같다). 마지막 그림을 그리려고 이것저것 도구를 펼쳐놨는데 어째 진행이 안되고 여러 생각만이 오버랩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을까, 수많은 삶의 우연성들... 생각이 그것으로까지 미치자 부끄럽지만 이 프로젝트가 시작된 계기가 된 첫 그림을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를 통해 나를>을 함께하고 있는 온수와는 ‘자연스럽게 그리기'라는 드로잉 수업에서 처음 만났다. 십여 명 내외가 함께 만나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는 소규모 그룹핑 교육이었다. 처음 인터넷에서 그림과 자유를 연관시킨 강사님의 안내 페이지를 보고 평소 내가 막연히 생각했던 그림 그리기의 접근방식과 흡사하여 망설임 없이 신청하였다. 평소 대외활동에 소극적이던 나로서는 의외의 결정이었다.
드로잉 수업은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해 주었고, 또한 어린 시절 그림 그리기를 통해 느끼던 자유함을 다시 마주하게 해 주었다. 나의 몽상이 백지에 하나씩 구현되던 그런 놀라움과 신비로움도 함께 말이다. 고등학교 시절 입시미술 학원을 2년여 다니며 내가 얻은 것은 자유함과는 반대로 규격에 맞춰 그들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강박과 재능이 없어 그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스스로에 대한 자격지심이었다. 결국 고3이 막 시작되는 시기에 그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미대를 포기하게 되었다. 나에게는 큰 좌절의 기억이었고 그림에 대한 흥미를 오랫동안 잃게 된 계기였다.
드로잉 수업은 매번 사전에 그림을 그려가야 하기 때문에 드로잉 노트가 필요했다. 첫 드로잉 노트를 구매하고 버스 안에서 돌아오는 길, 설레는 마음으로 뭐라도 그려봐야겠다는 생각에 새 노트와 펜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위의 그림은 바로 그때 그 움직이는 버스 안의 풍경을 그려 넣은 것이다. 막상 수업 시간에 해당 그림을 꺼내 놓으려고 하니 여간 어색하고 민망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수강생들 모두 그림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던 것이다(온수님의 그림을 떠올려 보시라). 미술학원에서의 기억이 떠오르며 괜한 망신을 당할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와우, 아주 좋아요. 실제적 현장이 구체적으로 느껴져요. 저는 이런 자유로운 선들이 참 좋아요"
잉? 어... 어디 어떠한 선들이....? 윤여정 씨처럼 나이가 들지는 않았지만 나도 사람의 칭찬을 거의 믿지 않기에(최근 그녀의 인터뷰 참고) 강사님의 이런 피드백에 다소 당황하였지만, 확실한 것은 그의 이런 말을 통해 나는 일종의 위로와 자신감을 얻었다는 것이다. 미술학원을 다니며 데생 수업 내내 선이 안 좋다는 말을 들었는데 선이 좋다니... 강사님의 수업을 통해 '잘 그린 그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 사람의 그 순간의 진실이 얼마만큼 (문학적 표현으로 하면) 핍진하게 드러나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때 경험의 영향인지 나도 우리 아이들에게 칭찬을 과히 하는 편이다. '오! 좋은데!', '오! 잘하는데!' 최대한 격려해주려고 한다. 특히 글쓰기나 그림 그리기 등 자기표현이 가장 중요한 학습 영역에는 잘하고 못하고를 따지지 않고 개성이 얼마큼 담겼는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아이가 너무 칭찬받으려고 수완을 부리고, 기대만큼의 칭찬을 받지 못하면 실망하고, 조그마한 꾸지람에도 상처를 받는 모습을 보며 문득 ‘이 방식이 괜찮나’ 걱정이 될 때가 많다. 아니다 다를까 '칭찬의 역효과'라는 다큐를 보고 나서는 의식 없이 칭찬을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굳이 그렇게 고심하며 칭찬할 필요가 있을까도 싶다. 그것을 고민하다가 오히려 칭찬의 타이밍을 놓치지는 않을까 우려스러웠다. 그렇게 되면 칭찬을 하게 되는 습성마저 놓치게 될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칭찬은 그저 립서비스가 아니다. 상대방의 장점을 봐주려는 나의 노력이고 동시에 그것은 항상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칭찬을 하는 것은 의외로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를 표현한 노래 가사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스미스(The Smiths. 영국 맨체스터 출신의 밴드로, 그들은 80년대 영국의 인디신을 강타한 전설적인 밴드이자 후대의 브릿팝과 인디 록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밴드로 평가받는다.)라는 밴드의 곡에서 문득 마음을 파고든 문장을 발견했다.
"It's so easy to hate
증오하는 것은 참 쉽죠
It takes strength to be gentle and kind
하지만 예의 바르고 친절해지기는 정말 힘들죠"
- The smiths / <I know it's over>
타인을 쉽게 힐난하기는 참 편하다. 그러나 그 한 사람의 서사를 돌아보면 그렇게 쉽게 판단하기는 어려워진다. 최근 나는 그가 누구이건 어떤 결과물이건 기본적으로 나보다 노력한 이라면 다 존중하는 편이다. 주변에 왕왕 아이돌 음악을 흉보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이 성공을 위해 노력했던 시간과 게으른 나를 비교해보면 나는 그들에게 거의 엎드려 존경심을 표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경연대회 같은 프로그램의 직설화법으로 주목받는 심사위원들을 보면, 나는 그가 프로페셔널로 보이기보다는 꼰대 아니면 콤플렉스 덩어리로 인식될 뿐이다(뭐 이 또한 쉽게 비난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얼마 전 인상적인 영상을 하나 보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9UlRUd3Vxak
다소 연출 같지만 아이스크림을 사주라던 아저씨의 말이 가슴 뭉클하게 다가온다. 친구나 가족들이 하는 오해 중에 하나가 이런 것이 아닐까? 가까운 사이니까 이렇게 솔직히 말해줘야 한다고,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라고. 그러나 내가 보았을 때 그런 조언과 힐난은 친구와 가족 말고도 말해줄 사람이 세상에 넘쳐난다. 해달라는 요청 없이도... 그럴 때 오히려 친구와 가족이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격려와 믿음이 아닐까?
진심과 진실이 담기지 않은 칭찬은 좋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거짓말이 좀 섞여 있으면 또 어떤가? 장담하건대 칭찬의 폐해보다 칭찬 없음의 폐해가 훨씬 클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칭찬을 아이와 내 주변에 후하게 하고 싶다. 심지어 돈도 들지 않는다. 장사 수완이 없는 나이지만 이보다 남는 장사는 없을 것도 같다.
- 추신: 늘 엉망인 그림과 글을 좋다고 말해준 온수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덕분에 계속할 수 있었다. 계속하는 것... 좋은 일이다. 중요한 일이다. 또한 부족한 내 글과 그림을 꾸준히 봐준 분들께도 감사드린다. 그 칭찬 덕에 1년을 보낼 수 있었다.
'온수'의 마지막 이야기는 5월 15일에 공유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