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수빈 1집 - Lisa in love
CD로 살 뻔했다가 못 사서 후회한 앨범이 2장 있다. 하나는 nell 1집, 또 하나는 하수빈 1집이다. nell은 중고가가 5만 원~10만 원까지 오른 걸 보고 재테크의 개념으로 후회했다면 하수빈은 100프로 팬심 때문에 후회됐다. 하수빈의 팬이랍시고 무엇 하나 팬질을 해본 게 없었기에, CD라도 갖고 싶었다.
중3 때였나. 라디오에서 나온 노노노노노를 듣고 무언가를 크게 두들겨 맞은 충격을 받았다. 그 전에도 하수빈과 노노노노노를 알고 있었지만 진지하게 들은 적은 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으니. 뭐.) 그러나 그때만큼은 집중했고 귀여운 보컬에 형용할 수 없는 멜로디에 푹 빠졌다. 핑클이나 SES 같은 동시대 걸그룹을 좋아해 본 적도 없었기에 내가 왜 이러지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은 유치해도 스토리는 확실했던 90년대 드라마를 좋아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하수빈 앨범에 참여한 예민, 윤상, 토미 페이지의 멜로디를 좋아하기도 했고.) 특히 '나에게 아픔을 남기지 마'의 애잔한 분위기는 항상 옛날을 그리워하는 내게 주제가와 같은 곡이었다. 사랑도 몰랐지만 어떤 좋았던 순간을 우아하게 회상하는 그 노래를 들을 때면 가슴이 시큰했었다.
물론 세상에 멜로디와 가사가 좋은 노래는 아주 많다. 그 노래를 하수빈이 불렀다는 게 중요했다. 그녀의 외모와 분위기, 목소리를 들으며 남중 남고의 삭막함을 잊을 수 있었다. 이 곳의 이해 안 되는 불쾌함과는 정 반대의 것이 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며 현재를 참았다. (사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때의 상황이 좀 말이 안 됐었다.)
인터넷을 쓸 수 있는 환경이 되면 (주로 학교 PC실) 하수빈의 팬페이지에 들어갔다. 예전 활동할 때의 사진을 보고 필터를 잔뜩 먹인 사진처럼 어색하지만 풋풋한 뮤직비디오도 봤다. 거기서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팬레터를 썼다. 그분이 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꽤나 진지하게 편지를 써서 게시판에 올렸다. (제목은 동경)
그 후 그분이 직접 팬페이지에 자신의 최근 사진을 올린 적 있다. (그때가 2000년 초반 같은데?) 하수빈의 컴백을 바랐지만 그 사진을 보는 순간 확실히 알게 되었다. 현재의 하수빈이 아닌 과거의 하수빈을 좋아하는 것이었다는 걸. 아무리 좋은 음악을 가지고 나와도 난 과거의 음악을 그리워할 거라는 걸. 그래서 추억으로 예쁘게 남았으면 싶었고 이후 컴백은 설로 끝났다.
2010년도쯤 그분은 새 앨범을 냈다. 그때 난 예전처럼 뜨겁지 않았기에 잔잔하게 응원할 수 있었다. (그때는 과거의 하수빈을 열렬히 좋아하지 않았기에.) 인상적이었던 건 리본 같은 패션을 무척 좋아한다는 것? 밴드 음악에 대한 의지가 있었다는 것?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어도 자신의 색깔을 확실히 보여준 앨범이었다. 그리도 이후는 또 10년째 활동을 쉬고 계신다.
언니네 이발관 어제 만난 슈팅 스타를 들으면 하수빈을 좋아했던 그때가 생각난다.
그리운 마음이 있어 너를 볼 때면
허전한 마음이 있어 그곳에 서면
누군가의 팬이었던 시간은 그 누군가로 인해 더욱 다채로운 빛깔을 띠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