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사 현대세계걸작 그림동화를 아시나요

by 한박달

어릴 때 가장 좋아한 건 하나의 동화책 세트였다. 이름하여 문선사 현대세계걸작 그림동화. 양장 동화책과 성우들이 녹음한 카세트테이프로 이루어졌다.


B4ZltXiCEAEGqBi.jpg 출처 : 안양시 도서관 트위터


대학교 때 주변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정말 한 명도 몰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이 동화책 세트는 엄마가 형에게 사준 책이기 때문이다. 나보다 5살 위인 데다 방문판매로 구매했으니 아는 사람만 아는 책일 것이다. 하지만 네이버에 카페까지 생긴 걸 보면 읽어본 사람에겐 큰 의미로 다가오는 동화책 세트가 분명하다.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참 많이 읽고 들었다. (이를 통해 한글을 배웠다는 확신이 있다.)


대단한 건 영미 동화로만 채운 컬렉션이 아니라는 점이다. 유럽, 중국, 이슬람, 인디언 등 세계 각지의 동화가 다양하게 공존했다. 여기와는 너무나 다른 거기를 꿈꾸고 상상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마음 한편엔 실낱같은 기대가 있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이보다 대단한 무언가를 보고 접할 거라고. 말도 안 되는 기대였다.


가끔 펼쳐보며 내 아이에게 물려주는 상상을 했다. 카세트테이프는 늘어날 대로 늘어났고 서체도 요새 쓰지 않는 종류이지만 생생한 그림과 감동적인 이야기만큼은 몇십 년이 흘러도 그대로일 거라 느꼈기 때문이다.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엄마가 사촌동생 집에 전부 보냈기 때문이다. 화가 났지만 다시 가져오는 건 귀찮고 치사한 일이었다.


사촌동생이 책을 좋아하면 보낸 보람이라도 있었겠지만 사실 그 애는 책 보는 걸 무엇보다 싫어했었다. 몇 년이 지나 이모 댁에 놀러 갔다. 몇십 권이 되던 동화책은 두세권 남아있었다. 동생에게 물어보니 동화책은 그 존재도 인식하지 못했다. 내겐 참 귀한 동화책이었는데... 아쉽고 또 아쉬운 일이었다.


그 후 두 번 다시 읽지 못했다. 동화책에 대한 환상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지금 내 마음속 문선사 현대세계걸작 그림동화는 걸작 중의 걸작이다. 드문드문 기억나지만 그 조금의 기억을 붙잡고 불후의 명작을 읽었다는 사실에 뿌듯함을 느낀다. 그런 점에서 지금 이 책을 다시 사고 싶지 않다. 오랫동안 키워온 환상이 깨질까 겁이 난다.


문선사 현대세계걸작 그림동화 중 가장 기억나는 건 하나님의 어릿광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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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 높았던 어릿광대가 나이가 들어 곡예를 못하는 떠돌이 신세가 된다. 죽기 직전 광대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지막 묘기를 선보인다.


누구에게나 마지막 빛나는 아름다운 순간이 있다. 하나님의 어릿광대가 많은 영향을 끼친 건 확실하다. 왜냐하면 늘 몰락한 이에게 관심을 보냈고 그가 다시 일어서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어릴 때 읽은 동화책이 가치관을 형성한다? 충분히 가능하다.


누군가 녹음테이프를 유튜브에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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