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몰 이후의 도시(1)

우리집 근처에서의 기행

by moment books

#1

간만에 아내와 다툼 후 밖으로 거의 어쩔 수 없다시피 나오게 되었다. 아직은 일교차가 심한 때라 쌀쌀한 공기가 다소간 느껴졌다. 가장 좋아하는 길, 평소에 혼자 많이 걷곤 했던 길을 걸어다녔다. 대로와 골목길, 번화가와 조용한 길을 가리지 않고 정처없이 걸어 봤다.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간만에 혼자 밖으로 나와 걸을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이다(?). 아내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최근에는 너무 집안에서만 같이 시간을 보내거나 장을 보러 갈 때, 무언가 볼일을 보러 갈 때 거의 항상 같이 다니는 경우가 많아 혼자만의 시간이 최근 절실했던 차에, 하나의 좋은 기회가 되어서 어느 정도는 유쾌한 기분으로 늦은 밤 바깥으로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2

11시가 넘은 시간의 바깥 거리는 상대적으로 낮과 비교해서 충분히 조용해져서 좋다. 그리고 도시의 맨얼굴을 보는 느낌이 드는지라 여러 가지 흥미롭게 관찰할 거리가 있는 시간대라는 생각이 든다. 온갖 도시의 본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시간대. 자정 즈음의 도시를 걸어볼 필요가 있다. 충분히 가치가 있다. 주간에는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던 거리에 이제 거의 사람이 보이질 않는다. 시각적으로 자극이 되는 요소들이 어느 정도 감소하고 나면 다른 감각들의 반응이 보다 활발해진다. 예민해진다. 다음날 수거를 기다리고 있는 엄청난 양의 쓰레기 봉투에서 나오는 냄새. 뛰엄뛰엄 도로를 내달리고 있는 차들이 내고 있는 소음들. 술 취한 몇몇 아저씨들의 고성방가 - 어찌된 것이 이 표현을 쓰는 것 자체가 정말로 구식처럼 느껴진다 - 가 제공해주는 냄새와 소음의 공감각적인 체험들. 너무나 익숙한 우리 도시의 맨얼굴이다.


#3

한참을 걸으면서 12시가 넘어간 시간을 보면서 갑자기 느낀 바가 있다. 보스턴에서 생활했던 당시의 기억이 떠오른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외국의 도시에서는 밤이 깊어진 시간대에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이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일로 간주된다. 온갖 불안요소가 잠재되어 있는 곳이 밤이 깊어진 도시의 거리들이다. 보스턴의 다운타운에서 꽤나 거리가 있는 곳에서 살았던 나는, 그나마 미국 내에서 치안이 양호했던 보스턴의 중산층이 사는 도시 근처를 주로 지나쳐서 학교를 통학했었다. 어쩔 수 없이 늦은 밤에 보스턴의 길거리를 걸을 때가 종종 있었는데, 바로 학교 식당에서 파트타임 근무를 하고 마친 이후 11시가 다 되어서 집으로 돌아갈 요일일 때 그러했다. 너무나 조용한 거리. 정말로 눈을 현혹시키는 네온사인 하나 켜져있는 않는 그런 거리였다. 간혹 인도를 걸어가는 다른 사람들을 스쳐 지나가게 될 때 느끼게 되는 미묘한 긴장의 감정이 아직도 생겨난다. 외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갔던 당시의 나는 알게 모르게 이런 상황 속에서 위축이 되고 긴장이 되곤 했다. 내가 저들 눈에는 '위험할 수 있는 사람'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단순한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분명히 그런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미묘한 감정이 교차하는 길고 긴 하굣길을 걷다보면 드디어 친숙한 집 근처의 환한 거리가 등장한다. 'Trader Joe' 매장 직원들이 마감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지상 전철 길을 건너서 집으로 들어왔다. 맑고, 쾌청한 밤 공기 냄새가 기억에 남는다.


#4

강동한림성심병원쪽은 강동구에서 유명한 유흥거리라고 할 수 있다. 어두운 골목길들을 걸어다니다가 병원 일대만 마지막으로 한번 둘러보고 집으로 돌아가고자 마음 먹었다. 어떤 퇴폐적인 느낌의 거리의 공기를 한 번은 들이마셔야 이 간단하고도 의미 깊은 밤 산책에 종결적인 느낌을 부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서울은 바로 네온사인이 있어야 제맛이다.

그쪽으로 향하는 길 가운데, 처음에는 그냥 하나의 커다란 봉투 더미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부단히 움직이고 있는 모습에 깜짝 놀라 자세히 살펴보았다. 살펴보니 어느 할머니 한 분이 수거를 위해 한 곳에 모아져 있는 재활용 봉투들을 뒤적거리면서 쓸만한 물건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정말로 할머니로부터 5미터 앞까지만 해도 절대 사람이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모습이었다. 놀란 것도 놀란 것이지만, 마치 하나의 흥미로운 관찰 대상으로 객관화시켜서 그분을 집요하게 살펴본 것은 아닌 건가 싶어서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조금 더 지나가다 보니 여러 청년들이 모여서 시끌벅적 떠들면서 걸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미 어느 정도 기분 좋게 취해있는 모습이었다. 흥미로웠던 것은 그들이 같이 불렀던 노래다. 학창 시절 음악시간에 불렀던 노래를 주제로 대화를 진행하다가 갑자기 '오 솔레미오'를 다같이 - 정말로 이탈리아 가사를 거의 틀리지도 않게 -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노래가 다 끝나고 서로 뿌듯한 마음을 분명하게 공감했다는 뜻으로 박수를 치며 웃으면서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할머니와 청년들. 이 어두운 거리에서 그들이 보이는 삶의 양태는 방향성, 목적성, 물리적인 형태 등 모든 측면에서 얼마나 대비가 되는 것일까. 삶의 회환과 열정, 곤궁함과 생동감, 무표정과 큰 웃음 등 모든 대비되는 이미지들이 동시에 느껴지는 순간이다. 불과 3분 안에, 나는 몇 백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에서 이런 것들을 거의 동시에 경험할 수 있다.

밤의 산책에서는 이와 비슷한 사례들은 얼마든지, 훨씬 더 많이 경험할 수 있다.


#5

병원 뒷 골목골목들은 너무 평범한 서울의 유흥가이기 때문에 특별한 점도 없었다. 단지 일요일 밤이기 때문이지 전반적으로 조용하고 침체된 분위기가 조금 더 강하게 느껴졌을 뿐이다. 우리들의 사고/사유를 단순하게 만들고 크게 진지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로 만들어주는, 네온사인과 콜택시, 취객들, 수많은 소주병들이 제공해주는 황폐한 서울의 밤은 나이 서른 정도밖에 안 된 나조차도 너무도 익숙해져버린 전형성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제 여기까지 이르렀으면 이제 집에 가서 자야만 한다. 너무 피곤해졌다.

네거리에서 차들의 순환과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을 잠시 보았다. 저기에 있는 저 사람, 또 골목골목 각자의 목적성과 방향성을 가지고 걸어다니고 있는 지금 이 시간대의 사람들은, 작고 소소한 거리에서의 만남과 지나침을 통해 어떤 특별한 떨림과 긴장을 느끼고 있을까. 아니면 이들은 이미 그런 감각적 체험을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우리 도시의 밤 거리에 아주 익숙해져 버려서 아무런 방향성과 목적성 없이, 그저 그곳에 위치한 하나의 물리적인 형태에 지나지 않은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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