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량함, 마음의 고질병

by moment books

종교적으로 접근했을 때 우리 마음속의 '황량함'은 충분히 그럴 듯하게 해석되어 왔다. 절대자에 대한 불신을 바탕으로 유한자의 한계를 뛰어넘어고자 애를 쓰다가 결국에는 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실패했을 때 경험하게 되는 체념, 자조적인 마음 상태에서 황량함에 가까운 절망, 무상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더더욱 '절대자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논리가 설득력 있고 당연한 진실의 명제로서 작용하는 것일 테다.


그러나 실제 우리 삶 속에서 얼마나 많은 부분이 이러한 '신적인' 차원에서의 해석이 불필요한, 너무나도 단순하고 '하찮은' 일들 속에서 황량함이라는 정서를 체험하게 되는지 모른다. 간단히는 지금 자신의 일터에서 하고 있는 업무에 대한 회의감에서, 좀 더 고상한 차원에서는 내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힘들게 일하고 있는가 하는 일반적인 인간의 고민에 이르기까지 - 시간적으로 따졌을 때는, 아주 미분해서 세세히 봤을 때 아내와의 다툼, 직장 상사가 하는 눈 뜨고 못 봐줄 행동들, 점심에 사먹은 맛없는 음식에 대한 생각 등 하루에도 수십 번씩 황량함의 감정에 빠져들게 하는 동인들과 마주하게 하는 순간순간들이 존재한다. 도대체간에 이러한 별것도 아닌 일들이 하루에도 얼마나 많이 한 개인으로 하여금 인생의 허무함과 황량한 마음을 들게 만드는 것인지!

예전에도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아마도 예상컨대 앞으로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질 것이 분명한 키에르케고르의 철학, 특별히 '죽음에 이르는 병은 곧 절망이다'라는 철학적 증명이 완숙의 단계로 나아가고 있는 사람일수록, 그리고 특별히 나에게 점점 더 매력적이고 친근하게 다가오는 사상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분명 키에르케고르가 강조하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의 중요 주제는 내가 오늘 말하고 있는 황량함의 주제와는 많은 부분 다른 것이겠지만, '아무것도 희망할 수 없음'의 상태에서 겪게 되는 인간의 절망적인 심리적인 상태가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한 인간을 철저하게 파괴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논제는 어느 정도 서로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라고 기억하고(해석하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오늘 하루도 이렇게 나에게 되묻고 싶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개인적인 기준에서의)하찮은 일들과 고상한 일들간의 조우를 통해 얼마나 심하게 심적으로 지쳐버리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그럴 만한 일인가?


정말로 오늘 하루 나에게 너무나 중대하고 크게 다가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들 가운데, 그만큼 나의 감정을 큰 기울기를 지닌 함수 그래프처럼 엄청난 기복의 흐름을 타게 만들 정도로 강력하고 밀도 있는 영향력을 지녔던 일들이 많았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솔직히 자신있게 "그렇다"라고 대답할 자신이 없어지는 것이다. 지금 일하고 있는 박물관 야외 스피커에서 울려퍼지는 베토벤 비창 2악장이나, 아이폰에서 쉽게 찾아서 들을 수 있는 고상한 음악들에 잠시 귀 기울이면서 당장의 유미주의에 취해서 온갖 빌어먹을 것들을 빠르고 손쉽게 날려버리고 따뜻한 가정으로 돌아가서 진정 내가 고민해야 할 것들에 - 차라리 전세 대출 방법이나 공무원 시험 합격 같은 것들이라도 - 조금 더 내 정력과 능력과 시간을 할애할 수 있다면 오죽 좋을까 싶은데 말이다.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수많은 주변 사람들과 최선을 다해 싸워나가는 일도 이젠 정말 지치다 못해 마음속 깊은 어떤 공간을 황량하게 만들고 있다. 정말이지 지겹고 허무한 싸움이다.


황량한 오후. 이 넓디넓은 박물관 정면 광장을 바라보면서 텅 비어버린 마음속을 내려다 본다. 전쟁기념관의 이 공간처럼 무언가 넓은 한 부분이 통째로 도망이라도 친 것 같다. 너무나 그 부재의 질량이 커서 다른 단단한 부분들 조차도 그 중력에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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