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서트홀에서 특유의 긴장감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정해진 순서에 따라 반드시 전개되어야 하는 일종의 프로그래밍된 연출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은 예술 장르 하나와 비교해보자면, 미술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미술은 시간성을 초월한 예술이다. 이 예술의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다소 과장한 표현이긴 하지만, 음악과 비교하자면 분명 그렇다. 미술 작품은 정적이고 특정 공간에 부착되거나 매달려 있는 등 고정된 공간에 배치된 형태로 관람객과 마주한다. 하나의 작품을 감상하는 데 ‘정해져 있는 시간’ 같은 것은 없다. 물론 작가나 큐레이터가 어느 정도 감상의 가이드를 제안해주면서 통제된 동선을 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마저 명령처럼 강제적인 방식으로 관람객에게 관람 시간을 통제하지는 않을 것이다.
관람객은 미술 작품을 대할 때 시간적인 요소보다 ‘관점과 공간감’이라는 시각적 요소를 기준 삼아 감상을 이어간다. 이것이 음악을 즐기는 방법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감상의 방법론적 측면이다. 어떤 관람객은 다음 일정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거의 스쳐 지나가듯이 관람할 것을 결심한다. 그래서 어떤 작품은 그저 슬쩍 훑어보는 행위를 통해서 지나치기도 한다. 어떤 관람객은 한 시간 내내 한 자리에서 하나의 작품만을 감상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그 관람객이 감상에 있어서 시간적인 제약과 통제를 전혀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술관에서 폐관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고 시간이 초과한 후에도, 억지스럽게 남아있는 관람객을 강제적으로 문 밖으로 끌어내는 경우를 제외하고선 말이다.
음악은 시간의 통제를 받는 예술이다. 그것은 정해져 있는 순서가 있다. 처음과 중간, 그리고 끝에 이르는 과정들에 나름의 규칙이 부여되었고 흐름이 있다. 그 곡 나름의 전개 방식과 논리가 있다는 것이다. 정해져 있는 악보에서(혹은 편곡된 버전이라면, 편곡된 작품의 악보에서) 정해져 있는 음표 하나하나에 대한 연주는 무조건 ‘플레이’되어야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것이 몇 시간짜리의 음악이라도 관람객은 그 시간적 규칙에 순응해야 한다.
하나의 곡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알고 있는 관람객은 음악의 이 시간적 속성 자체에서 강함 떨림을 느낀다. 그것이 음악이라는 예술을 감상하는 적절한 방법이기도 하다. 내가 절실하게 기다리는 바로 그 부분, 클라이맥스로 향할 때의 현악 파트에서 점점 소리가 강해지는 그 순간 같은 것 말이다.
베토벤 교향곡 9번 4악장의 4성부 독창 파트가 나올 때가 바로 그런 순간이다. 장엄한 교향곡 연주와 합창단의 박력마저 느끼게 만드는 합창이 공간을 휩쓸 듯이 지나간 이후에, 갑작스레 모든 연주가 잠잠해지고 4성부 독창이 시작된다. 나는 이 곡의 4악장 중반부에 접어들면 이 부분이 나오기만을 고대한다. 음악이란 끊김 없는 음율과 리듬의 흐름 속에 몸을 맡기면서도 어떤 절대적인 순간, 내심 경험하고 싶은 청각적 해소와 카타르시스를 용케 기다렸을 때 최고조의 환희를 경험할 수 있는 시간성의 떨림을 경험하는 예술이다.
다시 콘서트홀이라는 브릭으로 돌아온다. 공연은 이제 곧 시작될 것이다. 이 시간을 미사에 비유하고 싶다. 이것이 미사에 들어가기 위한 순간이라면, 이제 곧 시작될 예배를 기다리며 오르간 반주에 맞춰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질 때이다.
시각 예술의 감상과 참여는 어떤 특정 관점을 취해야 하는 성격을 띤다. 그래서 주제의 결정에 따라 어떤 작품을 볼 것인지를 취사선택하게 된다. 음악은, 다른 물리성에 빗대어 설명하자면 일종의 향과 같다. 어떤 공간에 피워놓는 향은 순식간에 공간 전체에 퍼져나가 가득 채운다. 그 공간에 위치한 사람은 그곳에서 향의 만연함을 체험한다. 그것은 내가 선택하지 않아도 체험된다. 향은 하나의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기체적 순환에 따라 이리저리 돌면서 그곳을 가득 채움으로써 불특정 다수에게 동일한 효과를 가져온다.
예배당에서 영성체가 시작되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낭독한 후 향을 피운다. 그 향은 보편성과 전체성을 띤다. 처음에는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향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효과를 보이지만, 금세 예배당 전체에 향이 만연해진다. 그리고 후각적 체험에 이어, 절대자의 임재라는 상징성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고백하게 된다.
콘서트홀의 음악 또한 공간을 가득 채운다.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 눈에 보이는 어떤 요소보다 강력하고 보편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청각적 요소이다. 모든 관람객은 동시성의 예술의 효과를 경험한다. 지금 이 순간 이 콘서트홀 안에 모여 있는 사람들, 그들 모두가 실시간으로 경험하는 대상은 동일하다. 동일한 음표와 동일한 리듬이 조화를 이루어 파동으로 퍼져나가 콘서트홀에 만연해진다. 그렇게 동시적 경험의 순간을 만끽함으로써 그 공간에서의 실존을 영위한다.
공연이 끝나면서 그 계속되던 떨림의 정도가 잦아든다. 연주는 공통의 약속대로 연주가 되고 종료되어야 한다. 그 보편적인 약속이 충족되었을 때 긴장과 떨림이 크게 해소된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떨림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성질의 떨림일 것이다. 그것은 앞서 공연 조건의 다름과 변수와 관련된 내용과 관련 깊다. 이것은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부분에서의 떨림이다. 관람객들이 어떤 부분에서 지휘자의 호흡이 거칠어졌는지, 어떤 부분의 화성이 가장 뛰어났는지를 논할 때, 그 공연만의 고유성을 발견한 기쁨이 주체할 수 없이 표현되는 것이다.
콘서트홀에서 일어나는 것 중 어떤 떨림이 더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어떤 떨림도 음악의 시간성이 주는 체험적 깊이를 뛰어넘는 무언가를 줄 수 없을 것이다. 음악은, 공연은 그것 자체가 숭고하며 완벽한 예배이다. 그것에 참여하여 처음과 끝을 온전히 경험했다는 사실 자체가 가장 중요한 의식이다. 콘서트홀이라는 브릭은 신비하지만 익숙한 순서가 존재하는 예배당이고, 음악은 그 예배당을 가득 채우는 향이자 동시성의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