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물건을 채우는 것과 비우는 것. 하나의 공간이 완성되었으면 계속해서 고민하는 일이다. 그리고 수차례의 시행착오가 따라오는 일이다. 그러다가 그 행위 자체에 미립이 나기 시작하여 하나의 ’양식‘이 나오기 시작하면 실수의 횟수는 줄어들고 거의 틀림없이 나다운 형태로 수렴되면서 공간적 조화를 달성한다.
사람은 한정된 공간과 재화를 어떻게 활용할지 끊임없이 고민해야만 하는 존재이다. 동물과 달리 사람은 단순 의식주에 필요한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공간을 사유하고 그곳에 자신을 대입시킨다.
처음 아지트를 만드는 것의 의미를 이야기할 때, 결국 이 작업은 자신의 ‘분신’을 만들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이제 그 아지트는 뼈대와 중요 기관들을 다 갖춘 상태이다. 그러나 하나의 온전한 육체가 나오긴 했지만, 그것으로 완벽히 “나답다”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 사람의 기호나 성향이 내 신체를 완벽히 복사한 외향만으로는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그 내부를 채울 차례이다.
나만의 공간은 외부인이 방문했을 때 이 공간이 어떤 공간인지 알아차릴 만큼의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차림을 갖추었다. 벽체에 손을 가져대서 만져보고, 방에 무엇이 있는지 둘러보고, 테이블 위에 어떤 물건이 올려져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유추해 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정확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외부인에게도 그렇지만 나 또한 혼란스럽다. 나는 각각의 공간에 이름과 성격을 부여했다. 그런데 그것들이 과연 그 외형적인 형태대로 기능할 것인가를 묻는다면, 갑자기 자신이 없어진다. 여기에는, 껍데기가 있는데 내용이 없는 것이다. 무엇을 채울 것인가. 어떤 것으로 텅 빈 채 덩그러니 놓여 있는 브릭을 채워나갈 것인가.
이제 작업실로 이동한다. 작업실에서는 회사에서 받은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PC를 켜고 오피스 프로그램을 구동시켰다. 프로젝트 수행을 위한 아무런 일정표도, 어떠한 업무 방향성도 정해지지 않았다. PC 왼쪽으로는 이사하면서 하나 놓아둔 탁상 달력이 보인다. 2020년으로 넘어간 지 한참인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아무런 내용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업무용 수첩을 펴보았는데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거실로 이동했다. 거실에서는 경음악 하나가 재생되고 있었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쉼을 위한 공간이기에 사실상 아무것도 없어도 될 공간. 그래서 그렇게 비어있는 상태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도 들 필요가 없는 공간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불안감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는데, 그것은 방금 전 작업실에서 확인한 회사 새 프로젝트에 대한 내용이었다. 여러 가지 내용 중 아직 예산 계획이 초안조차 잡혀 있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큰 근심이 되었다. 이 부분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십분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불현듯 지금 이 공간에서 무엇을 확인하기 위해 온 것인지를 상기했다. 민망한 기분을 느끼며 다음 방으로 이동했다.
서재에서는 내가 아끼는 모든 책들이 책장에 꽂혀 있는 모습을 보고 안도했다. 이것 하나는 제대로 되어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착각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최근에 읽고 있던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책을 찾기 위해, 이전에 사회문화 파트로 분류한 책장 가장 왼쪽 부분으로 눈길을 향했다. 그곳에는 그 책이 없는 것은 물론, 다른 분야의 책들이 두서없이 이리저리로 꽂혀 있는 모습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무엇이 나올지 기대하며 ‘럭키박스’에 손을 가져대는 심정으로 접근해야 할 지경이었다.
책장 전체가 그런 상태였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빈센트 반 고흐 전시도록 위에 올려져 있었고, 뇌과학 최신 이론을 설명한 책이 지난번 일본 여행 때 샀던 귀여운 고양이 그림이 그려져 있는 실용 서적 바로 옆에 꽂혀 있었다.
결론을 내렸다. 나만의 직사각형 공간 내부의 방들은 아직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는 공간이다. 소프트웨어가 갖춰지지 않은 공간이라고 말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했어도 구체적인 계획에 입각해 무언가를 채우고 만들어가지 않은 공간은, 사실상 원래의 집이나 사무실처럼 공허하고 권태로운 공간일 뿐이다. 결국 다음과 같은 질문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작업실에서는 어떤 작업물을 가지고 와서 할 것인가.
생계 유지를 위한 작업은 하루에 어떤 시간에, 몇 시간을 정해서 할 것인가.
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공간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거실에서는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
나는 어떤 시각물로 공간을 채울 것인가.
거실에서 음악을 재생하는 것에는 일정한 규칙이 필요할 것인가.
어떤 책과 자료를 가져와서 책장을 구성할 것인가.
어떤 기능성의 물건들을 내 작업실에 가져와서 사용할 것인가.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글을 쓸 것인가.
....
나는 이밖에도 각각의 공간에 대해 여러 질문을 추가적으로 던져 보았다.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궁극적인 이유는, 내가 최초에 나만의 공간을 만들기 위한 목적성을 잊지 않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환경을 구성하기 위함이었다. ‘목적-설계-실행’이라는 도식이 실질적으로 이뤄지려면, 결국 원하는 형태의 공간이 실질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직접적인 행동을 보여야 한다. 물리적인 도구이든, 정신적인 상태에든, 무언가를 채워 넣어야 한다.
이미 큰 차원에서의 대분류는 이뤄졌다. 어떤 공간이 어떤 목적성을 띤 공간이지 확정해서 가장 필수적인 가구들로 이미 지난번 작업을 진행했다. 이제 구체적으로 어떤 세세한 물건을 넣고 뺄 것인지에 대한 번거롭고 손이 많이 가는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때때로 나는 바로 이 단계에서 원래의 관습으로 회귀해버리고 도망쳐버리는 일을 반복했던 것 같다. 아이디어와 계획, 그리고 어떤 일을 시작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구색 맞추는 행위는 대부분 수월했다. 그런데 그 이후에서 유쾌한 기억들은 떠오르지 않는다. 논문의 본문을 쓰지 않고서 그럴싸하게 초록만 완성해 놓은 꼴이었다.
직사각형의 ‘브릭’, 곧 나만의 공간은 어떤 일을 실질적으로 할 수 있게끔(설령 그것이 표면적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무위적 쉼의 공간이라 할지라도) 동기부여가 되며 특정 행동의 촉진제와 같은 역할을 하도록 만든 공간이었다. 나는 환경의 변화가 행동의 변화가 이끄는 데 가장 결정적인 조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브릭을 꾸며보는 것이다.
여기서 고민해야 할 점은 어떤 환경을 기획하느냐이다. 머릿속에 구상한 특정 환경의 구체적인 형태를 그리고, 각각에 적절한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이 작업이 이뤄진 공간에서 원하던 진정한 결실을 얻을 것이다. 바로 그 구체성을 확보하는 일을 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