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좋아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언제나 무엇을 만들지 고민한다. 물건을 만들어내는 사람을 우리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수제 의류에서부터 맞춤형 자동차를 만드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부문에서 물건을 직접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있다. 일반적으로 사회에서는 만들어내는 물건의 종류와 그것의 경제적 가치를 따진다. 즉 얼마나 많은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인가 하는 희소성의 원리에 따라 물건의 가치를 책정한다. 역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자의 기술력과 창의성의 정도로 물건의 가치를 결정하기도 한다. 뛰어난 기술력과 전통을 지닌 사람을 우리가 장인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무형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사람에 대해서도 말해야 할 것이다. 끝도 없이 많은 분야가 여기에 열려 있다. 민속학적이거나 문화적인 관습에 기반한 기술을 지니고, 세대와 세대를 거쳐 후대의 사람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전통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공식적인 교육기관에서의 학문 활동을 통해 중요한 가치를 만들어낸다. 당장의 경제적인 가치로 환원되지 않으며, 그 가시적인 결과물의 형태를 즉시 알아차리기 힘든 영역이다. 그러나 그 파장력은 어떤 장인이 만들어낸 놀라운 디자인의 가죽 구두 하나의 가치보다 훨씬 더 장기지속적이고 불특정 다수에게 혜택을 돌아가게끔 할 것이다. 플레밍의 연구실에서 탄생한 페니실린이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살린 것처럼 말이다.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어떤 것을 만들 것인지 모르는 채 무작정 물건을 만들기 시작하다가 운 좋게 보물이 탄생하는 경우도 있겠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물건을 ‘고안’하는 것이지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특정 목적을 위해 깊은 고민과 거듭된 기술적 시도 끝에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이지, 기존에 존재해 있는 것을 선착순 식으로 누군가가 선점하는 일은 아닌 것이다. 만약 그런 식의 발견이 중요한 일이라면, 여기서는 작업실을 논하기보다는 『보물섬』 이야기나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야기를 다루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여기서 할 이야기는 작업실에서 우리의 머리로 고안한 어떤 물건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을 것이다. 창의성은 완전한 ‘무’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작은 씨앗을 땅속에 심어서 발아시키고, 적절한 물과 햇빛을 제공하여 제구실할 수 있는 훌륭한 식물로 키워내는 일처럼 어떤 단계를 거쳐나가면서 완성되는 일에 가깝다. 때때로 어떤 새로운 영양소의 개발과 적용이 이 식물을 극적으로 더욱 건강한 식물로 만들어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게 할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어느 지혜로운 농부의 기발한 화학적이고 식물학적인 시도를 통해 새로운 종이 개발되어 비약적인 생산력을 가져다줄 혁명적인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하나의 정상적인 과정에 가미하는 이같은 새로운 시도가 바로 창의성의 메타포가 될 것이다.
어떤 일의 시작은 항상 어렵다. 학생일 때도 마찬가지이고 처음 지정되어 맡아야 하는 일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에술 분야에서 활동하는 작가에게도 이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처음 주어진 캔버스와 오선지와 노트를 마주했을 때, 그것을 어떻게 채워 넣어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은 그들에게 창작의 고통을 안겨줄 것이다.
조금 더 현실적인 요인이 있다. 자본의 이슈가 있을 것이다. 적절한 기금 지원의 단절, 이윤 창출의 원활한 구조가 부재한 기관에서는 당연하게도 생산하고자 하는 대상의 질과 양을 확신할 수 없다. 그것은 나사가 덜 갖춰진 물건이 될 수도 있고, 아예 머릿속에서 아이디어로만 존재하고 종이에 그려지지 못한 채 사라져버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무언가를 만들고자 할 때 우리의 환경적 상태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일상을 살펴본다. 우리에게는 잘 구획되어 있는 방이 부족하다.
잘 구획되어 있는 방. 그곳은 환경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말하는 것이다. 그곳에서는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 국가나 대기업의 막대한 기금을 바탕으로 설립된 건물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공간의 목적성에 맞는 조건과 도구들이 갖추어져 있는 공간, 그곳이 잘 구획되어 있는 방이다.
이곳에서 어떤 위대한 수학자의 탄생을 기대해볼 수 있다. ‘푸앵카레의 추측’ 같은 수학의 7대 난제 중 하나도 어느 검소하지만 잘 갖춰진 연구실에서 해답이 나왔을 것이다. 위대한 희곡을 탄생시키려는 작가는 자신의 서재에서 머리를 부여잡고 수차례 시도 끝에 시대를 앞선 작품을 탄생시켜왔다. 적절한 공간과 재능이 시공간적으로 잘 맞아 떨어졌을 때 세상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크고 작은 일들이 생겨났을 것이다.
어렸을 적에 TV를 통해 미국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마다 내가 느낀 인상은, 그 사람들이 무언가 만들 수 있는 독립적인 공간을 풍족하게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곳이 차고이든, 서재이든 말이다. 중산층 이상의 평범한 미국인들은 무언가 뚝딱뚝딱 만드는 적절한 환경 속에서 저마다의 작업실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그 모습이 내게 인상 깊었고 부러웠던 부분이다.
우리네 삶에서는 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환경이 익숙하다. 중산층이어도 미국인들처럼 이리저리 무언가 뚝딱이며 물건을 만들 수 있는 차고나 창고가 있거나 하지 않다. 국내 주거 공간에서 확보할 수 없는 공간에의 갈증은, 얼마간 비용을 지불하고 임시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 문화를 확산시킨 것 같다. 알다시피 우리 주변에 ‘공간 사업’이 얼마나 다채롭게 발전되어 있는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무언가 만드는 작업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적절히 구획되어 있는 방들 가운데 작업실이 없다는 점이다. 단순한 환경 탓을 넘어서, 절대적인 부재와 결여를 말하는 것이다. 잉여의 시간에서 창의로운 물건이 나올 것인데, 터무니없이 적은 브릭의 전체 면적에서 의식주에서 가장 필수적인 공간에 하나둘 떼어주고 나면 여분의 공간은 남지 않은 것이다. 이 공간은 그냥 포기할 수도 있는 부분인데, 그것도 쉽지 않다. 인간은 자연스럽게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이 충족되면, 잉여의 시간 동안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자기만의 ‘작업실’을 만들어내고 싶기 마련이다.
단순한 일상적 삶의 영위 속에서는 아무런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없다. 만든다는 행위는 시간과 공간의 여유가 확보되었을 때 가능한 일이다. 버트런드 러셀이 거의 백 년 전쯤 그의 에세이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이 점을 정확히 짚어내어 설명한 바 있다.
모든 노동자에게 법정 노동시간을 절반으로 줄여라.
그 남은 잉여의 시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라.
그 게으름 피우는 시간에 하는 창의적인 활동이
원래 일했던 노동 시간에서 두 배의 생산성을
훨씬 상회하는 가치를 만들어낼 것이다.
러셀의 확신에 가득 찬 주장이 인상적이다. 이것은 일종의 ‘게으름주의 선언’이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생산성 창출을 위한 게으름을 찬양하는 것이다.
치열하고 빈틈없는 일상이 자연스러운 우리에게는 현실성이 괴리된 이야기로 들린다. 만에 하나 남은 잉여의 시간이 있더라도 우리는 몸에 밴 습관 때문인지 그런 여분의 시간을 활용할 줄 모른다. 우리는 여분의 시간을 갖게 되면 집값 충당을 위해, 우리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대비를 위해, 좀 더 괜찮은 차를 구입하기 위해 추가적인 노동을 한다. 우리의 노동력과 시간을 대가로 주어 조금 더 많은 현금을 얻어내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다.
나는 이것에 대해 비난조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 또한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다. 조금이라도 더 아르바이트를 통해 돈을 확보하려고 하고, 조금이라도 적금이나 주식을 더 들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끝이 없다. 사회적으로 신자유주의적인 시스템이 완고히 자리를 잡고 모두가 그러한 생활 방식에 동의하여 살아가고 있는 이상, 이런 삶의 굴레에서 완전히 이탈해서 초연하게 살아가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