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은 새로운 환경이 빚어내는 환경이 삶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 가상의 시나리오로 꾸며봤다. 장소는 제주도다.
어느 날 호텔에서 일어나 눈을 떠 보니, 이곳에서 시간을 보낸 지 이제 열두 시간도 채 안 되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곧이어 시간이 잠시간 멈춰버린 듯한 기분이 다시금 나를 압도했다. 바깥을 보니 그림 같은 해변의 풍경이 펼쳐져 있다. 깨끗한 모래사장이 만들어낸 부드러운 색깔과 파도치는 바다의 푸른 색깔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하나의 비현실적인 장면으로 다가왔다.
이런 광경을 눈앞에 두고 하릴없이 한정된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겨 시간 낭비할 일이 아니었다. 순간의 광경은 이미지로 머릿속에 각인되겠지만, 지금의 나는 엄연히 현실의 시간 속에서 이 아까운 시간들을 점진적으로 과거로 계속 흘려보낼 것이기 때문이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어떤 일들을 하며 시간을 보낼 것인지 간단한 계획을 세웠다. 크게 오전, 오후, 저녁으로 나눴다.
오전. 샤워를 하고 수첩에 글을 쓴다.
오후. 간단히 배낭을 싸고 호텔을 나선다. 유명한 오름이 근처에 있기에 그곳을 완주하고 돌아온다. 돌아오는 길에 호텔 앞 해변에 한 시간 정도 들린다.
저녁.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근처 음식점에 들러 식사를 해결한다. 들어와서는 샤워를 하고 로비에서 라이브 공연을 잠시 감상한다. 방으로 돌아와 수첩을 꺼내 오늘의 여정을 기록한다.
크게 나무랄 것이 없는 계획이었다. 나는 수첩에다가 구체적인 동선과 세부 시간 계획까지 세웠다. 들려야 할 맛집과 카페들을 인터넷으로 검색도 해보고, 어디가 가장 사진이 잘 나오는 ‘포토존’인지도 살펴봤다. 문득 시간이 생각나서 시계를 보니, 이런. 벌써 12시가 다 되어가는 것이었다.
급하게 준비해서 밖으로 나왔다. 늦은 아침을 간단히 호텔 근처 편의점에서 해결했다. 차를 렌트한 것이 아니기에, 대중교통 운행 시간과 도착 시간을 잘 고려해서 움직여야 한다. 무작정 걸어다녔다가는 계획한 대로 일정을 마치기 어려울 것이다.
도착한 곳은 제주도의 유명한 오름 중 하나이다. 입구에서부터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사람이 많진 않았다. 한적한 비수기에 날을 잡아서 이런 곳에 온 것은 몇 번을 생각해도 정말 잘한 일이다. 이번 여행은 특별히 아내가 허락한 혼자만의 여행으로, 앞으로 몇 년간 이런 날이 오기 힘들 것임을 너무나 잘 알기에 더더욱 소중한 여행이었다. 허투루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 결코.
오름에 오르는 동안 나는 어떻게 해야 이 시간을 잘 사용할 수 있을 것인지를 두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주변에 황소가 있는 것이 잠깐 보인 듯했으나, 그것이 지금 그렇게 흥미로운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나에게는 계획이 중요했다. 이곳을 일주하고 내려오는 시간은 얼마 정도 될 것이며,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일몰 전 해변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일까. 저녁은 어떤 지역 맛집을 찾아가야 할 것인가. 그곳은 유명 관광지 한가운데 있는 곳이라 돈에 눈이 먼 음식점 사장이 기존에 썼던 반찬을 재사용하는 곳은 아닐까. 지금이 여름이 가까오는 시기인데 회를 먹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인가. 저녁인데 술도 한잔 해야겠고... 아, 그러고 보니 아내에게 지금 어디에 도착해서 무엇을 하는지 중간보고 하는 것을 잊지 않았던가!
오름에서의 산행은 내가 과연 그곳에서 무엇을 ‘감상했다’라고 표현하기에는 문제 소지가 있는 일이었다. 머릿속에는 언제나 다음에 대한 계획만이 중요한 생각으로 떠올라 머리를 어지럽혔다. 나는 여기에 도대체 무엇을 보고 느끼기 위해 온 것일까.
호텔 근처 해변에 도착했다. 나는 지난날의 추억을 끄집어내어 그것을 즐거운 기분으로 회상하고 앞으로 할 일에 대한 청사진을 그려보기로 했다. 일몰 즈음의 수평선은 너무나 아름다운 빛의 부서짐 효과를 과시했고, 물은 너무나 맑고 청량했으며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바다 내음을 한껏 뿜어냈다.
모든 조건이 갖춰져 있기에 사색에 잠기는 일도 어렵지 않아 보였다. 좋은 기억들, 어떤 사람들을 떠올리는 기억에 빠져들다가 전화 진동이 느껴져서 확인했다. 업무상 관련 있는 업체에서 온 전화였다. 받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이쪽이 보통 급한 일이 아니면 연락하지 않을 곳이어서 궁금함에 전화를 받았다. 아주 큰 일은 아니었다. 제품 납품일을 조정해야겠는데, 회사에 연락해 보니 담당자(나)가 부재중이어서 부득이하게 개인 번호로 연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화를 끊고, 우선 내가 휴가 중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은 회사 내부의 직원 누군가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의 흠, 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아쉬웠던 점과 못마땅했던 점들이 상기되면서 지금의 일과 절묘하게 연결이 되었다. 그 사람의 잘못을 좀 더 책망할 수 있는 좋은 근거가 되었다.
다음으로는 납품일 변경 건에 대한 주제로 넘어갔다. 왜 하필이면 이 일이 또 연기되었는지, 그리고 또 하필이면 이 담당자에게 똑같은 일이 다시 한 번 일어난 것인지 생각해봤다. 좋은 생각이 들리 없었다. 정확한 지침을 주지 못하는 데 책임이 있는 본부장, 그리고 그 외 여러 책임이 있을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거울로 확인하지 않았지만 내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을 것이다. 그 얼굴색만큼이나 주변도 어둑어둑해졌고, 저 멀리 보였던 수평선 근처의 어여쁜 섬의 실루엣도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어떻게 해야 가장 ‘올바르게’ 호텔이라는 브릭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일까. 모든 것이 정비하고 말끔하게 준비되어 있는 곳.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내 일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이곳이야말로 현재의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기에 가장 적절한 공간이 호텔이다.
지금까지의 일에 대해 숙고해보고 찬찬히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 정도 가지고 돌아갈 수 있어도 나는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을 얻은 것이다. 육체적인 편안함과 좋은 음식은 부차적인 것이다. 그런 것은 심적으로 편안한 상태가 되었을 때 어떤 형태로든 만족스럽게 여행지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된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정리이다. 온전한 자신으로 유지하는 작업 말이다.
사실 그런 차원에서 이날의 여행은 대실패였다. 제주도의 오름과 해변은 결국 해소되지 못한 사념을 불러들여 눈앞으로 가지고 오기까지 했다. 이런 상태에서 애써 벗어나고자 머릿속을 계획의 연속으로 채워나가는 강박은, 결국 내가 혐오하고 도피하고 싶은 현실을 내 마음대로 정리하고 통제하지 못함을 방증할 뿐이었다. 몸은 모든 것이 갖춰진 브릭 안에 있지만, 정신은 여전히 서울의 한 사무실과 가정집 위를 부유하고 있다. 이런 식의 항상성이라면 질색이다. 언제나 일과 일상에만 매몰되어 있는 순간을 유지하는 식의 항상성 말이다.
호텔에서의 항상성 유지는, 언제나 나답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상태로 회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끽하는 일이다. 우리는 자유가 허락된 공간, 편안한 곳에서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공간에 있다. 이때의 내 자유의지를 믿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내 의지대로 내가 생각하는 나를 지켜낼 수 있는 능력과 습관을 길러야 한다. 일종의 훈련처럼 부단히 애써야 하는 일인 셈이다. 우리 몸이 항상성을 유지하여 모든 기관의 정상화를 이루듯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호텔의 항상성은 나다운 상태를 유지하고 즐길 수 있는 환경과 마음가짐을 유지할 수 있는 상태의 표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