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7 - 연남동에서
재선이와 약속이 있어 일찌감치 - 그래봤자 1시가 지나 카페에 도착했지만 - 연남동으로 나왔다. 실 한 볼을 다 써서 만든 '비니여야 했던 것'은 결국 폐기처리되었고, 나는 결국 좋은 실을 사러 인근 바늘 이야기에 갈 생각이다. 여기는 현경이가 가고 싶다고 했던 곳인데 어쩌다보니 나 혼자 가게 생겼군. 나는 남은 한 시간 정도 동안 빈티지 숍에서 현이의 바지와 내 외투를 조금 둘러볼 것이고, 레이먼드 카버 소설의 쪽글을 감정 위주로 쓸 생각이다. 감상을 썼던 노트를 가져올걸. 요즘은 잊기도 잘 잊고 단순한 계산도 잘 안 돼서 더 의식적으로 머리에 힘을 주려고 한다. 메모장을 쓸 수 있어도 계속 기억하려고 한다든가...뜨개질이 잘못 나아가고 있다는 걸 알면서 결국 끝까지 떴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을 때는 역시 그냥 처음으로 돌아가는 게 맞는데, 미련하게 다 뜬 것은 내가 자꾸 뭔가 실패하면 다른 걸 시도하려고 하는 사람이 아닌가 자괴감이 들어 그런 것이다. 옆 사람들이 누군가를 향해 손을 흔드는 듯 했다. 그걸 보며 나는 새로운 사람들이 오히려 편하고, 몇 번 만난 사람들과 무척 어색하다는 걸, 혹은 어정쩡하게 말을 놓고 아는 사이인 사람들에게 낯을 많이 가리는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결국...시작과 첫인상에만 강할 뿐 알면 알수록 껍질뿐인 사람인 건 아닐까? 언제부터 이렇게 깊숙하게 척하는 사람이었던 걸까. 회사도...다시 돌아가면 되는데 그럴 기회를 준 건데 이전보다 더 잘해내야 나의 이 시간이 당위성을 갖게 되는 것일 듯해 두렵다. 나아져야 하는데...내 삶은 성장의 역사인지 잘 모르겠다. 지금은 정말 퇴보만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지만 결국은 엉망인 완성품을 얼레벌레 내기만 한다. 오늘은 대성당에 대해 정말 뭐라도 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