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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명 Aug 12. 2024

(2) 타월

선명의 계절 사물

중학생 때 좋아라했던 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1권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타월이란 행성 간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가 지닐 수 있는 물건 중 최고로 쓸모 있는 것이다. 타월은 어떤 점에서는 대단히 실용적이다.(중략)

어떤 히치하이커가 타월을 가지고 다닌다는 사실을 어떤 스트랙(히치하이커가 아닌 사람)이 알게 되면, 그는 그 히치하이커가 칫솔과 세수, 수건, 비누, 비스킷 깡통, 보온병, 나침반, 지도, 끈 뭉치, 모기약, 우비, 우주복 등도 가지고 다닌다고 자동적으로 믿어버린다. 게다가 그 스트랙은 그 히치하이커가 어쩌다가 이 물건들이나 다른 이런저런 물건들을 ‘잃어버렸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기꺼이 이 물건들을 빌려줄 것이다. 그 스트랙은 광대한 은하계의 구석구석을 히치하이크하며 그 모든 불편을 참아내고 최대한 돈을 아껴 쓰고 끔찍한 승산들과 맞서 싸우고 끝까지 이겨내면서도 여전히 자기 타월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대접해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은하수에서 타월은 진짜 유용한 신분증명도구인 것이다. 요즘 회사에서 매거진 만드는 일종의 TF팀에 소속되어 글을 쓰고 있는데, 책에서 등장인물보다 강렬했던 등장사물에 대한 기획을 맡았다. 한두 개는 퍼뜩 기억이 나는데 열 개 이상을 쓰자니 영 고역이었다. 그렇다고 허위로 쓸 수도 없고. 최근 2~3주 간은 평생 읽었던 책들을 톺아보는 데 시간깨나 썼다. 그래도 가장 먼저 생각 난 고마운 사물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이하 <은하수>)의 타월이었다. 목욕 가운을 입고 타월을 두른 아서(영화도 인상깊게 봐서 그냥 마틴 프리먼 얼굴로 고정됨)의 영문 몰라하는 표정을 생각하니 웃기기도 하고 아련하기도 하고.

오랜만!

저자인 더글러스 애덤스의 유머가 좋아 벽돌책에 권수도 많은 <은하수> 시리즈 독파에 몇 번이나 도전했었고(2권까지가 한계였다.) 그의 다른 작품 <더크 젠틀리의 성스러운 탐정 사무소>도 열심히 읽었었다. 물론 아무리 뇌에 힘주고 읽어도 중2 유진이는 내용의 팔십 퍼센트도 이해하지 못했지...운좋게 <은하수>,<더크 젠틀리> 모두 팬층의 기대치에 미치는 영화화/드라마화가 되었고 딩중 진희는 머리에 물음표 띄우면서도 아스트랄 sf의 맛을 즐겼었다. 이런 장르를 함께 좋아해줄 동년배 친구는 전혀 없었기에 15살 유진이는 인터넷 세상에 인생을 바칠 뻔 했으나 현생으로 이끌어준 구원자가 등장하게 된다. 나와 열 살 차이가 났던,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서 처음 교사 생활을 시작한 국어 선생님이 상당한 레벨의 덕후였던 것이다. 우리는 남들이 보든 말든 쉬는 시간마다 즐겁게 서브컬처 얘기를 나누곤 했다.(지금 생각하면 정말 감사할 따름이다)그녀는 2005년 <은하수> 개봉 당시 필름 포럼에서 있었던 '수건 상영회'에도 다녀온 몸이었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5/09/22/2005092270378.html

"우주 히치하이커들, 수건들고 오라"

 선생님과는 스무 살이 되어서 한 번, 직전 직장을 그만둘까 고민할 때 한 번 뵙고 최근에 또 연락이 닿아 만나기로 약속했다. 두 번째 만남에서 선생님과 나 모두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어서, 선생님은 늘 다 큰 어른일 것 같은데 나와 같은 입장에 있다니 신기했다. 심지어 10년 동안 변해온 관심사의 궤적이 비슷했다! 우리는 언제든 어디서든 만날 운명이었겠네요' 하고 속으로만 웃었더랬다. 선생님이 후원하고 계시는 단체 이야기가 계속 마음에 남아 있었는데, 최근 여성민우회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나도 후원 회원이 되었다. 왜 진작 안했을까 싶을 정도로 뿌듯함이 크다. 게다가 이번 후원 회원에게는 타월도 줬다. 나는 6월의 후원 회원이었는데 탐이 난 나머지 슬쩍 말씀드려 받게 됐다. 약간 민망하지만 우리 집에 있는 어떤 타월보다 보드랍고 도톰해서 굳이 말씀드려 받길 잘했다 싶다. 두르고 다니면 진짜 신분 증명 도구가 될 것이다...

문득 왜 축하의 의미로 타월을 돌릴까 궁금해져서 찾아보니 타월은 다른 물건보다 오래 사용하니 오래 기억에 남는 물건이고, 많아도 부담스럽지 않고 남녀노소 사용하는 물건이라 그렇다고 한다. 정말 받았을 때 타월만한 게 없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런 답례품 이미지가 박혀서 고급 타월 시장은 한국에서 거의 망하다시피 했다고 한다. 내가 타월을 돌릴 일이 생기면 진짜 고급 비치 타월을 만들고 싶을 것 같은데...우리가 흔히 쓰는 40*80cm짜리 말고, 몸을 둘둘 말 수 있는 그런 큰 사이즈의 타월을 만들고 싶다. 이번에 정동진에 갔을 때 돗자리가 아니라 작년 펜타포트에서 경품으로 받은 비치타월을 들고 가서 모래사장에 깔고 앉았는데 왠지 더 포근하고 아늑하게 느껴졌었다. 추울 때 덮을 수도 있고, 아무데나 깔고 누워서 한숨 잘 수도 있고. 진짜 유용하잖아! 어릴 때 조선시대 배경 만화를 보면 꼭 먼길 떠나는 사람들이 봇짐을 지고 가는데, 그 봇짐 지고 가는 모습이 왜이리 멋있어 보였는지. 그것도 타월같은 보자기에 둘둘 싸서 매고 가는 거니까, 타월은 동양이고 서양이고 마력이 있나보다. 나도 목에 도톰한 타월 하나만 두르고 정처없이 헤매보고 싶다.

예쁘다 예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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