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흰 백 Jul 01. 2024

얼굴에 난 당신의 나이테

내가 아름답게 바라보는 존재들은 그들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모양이다.

 정신 차려보니 올리브영 세일 마지막 날이다. 여름이 오기도 전에 깨끗이 비운 선크림을 다시 사러 갔다. 오색찬란한 진열대들에 시선을 뺏기다가도 문득 기초 세션에 눈길이 꽂혔다. 멈추어 서서 찬찬히 둘러봤다. 공통점이 보인다. '전후 비교'라는 마케팅 전략이다. 예컨대 00만 개 셀링, 극적인 개선 효과! 같은 문구, 주름이 개선된 50대의 사진, 톤그로 사진을 배치한 퍼스널 컬러에 맞는 스타일링 등등. 그러나 애프터 사진의 완전무결함보다, 전후의 대비감에서 나는 문득 미추의 이질감을 느낀다.


  밝히건대 나는 건강함과 아름다움이 좋다. 건강한 신체, 깨끗한 피부, 조화로운 색감 배치는 삶을 활력 있게 만들고 오감을 즐겁게 한다. 그렇지만 마케팅과 상품에서 아름다움을 감각할 때 나는 늘 짚어본다. 아름다움을 좇고 있는가, 추한 것을 피하고 있는가 말이다. 또 한 번 짚어본다. 미추는 절대적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혹시 내가, 아름다운 것 옆에 있는 모든 존재들을 추로 보지는 않는가.


 마케팅이란 소비자의 욕구를 파악해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 목표인 영역이다. 즉,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판매'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인간의 복잡한 심리를 결합시켜 '구매'로 이어지게 하는 전략적 학문이다. 의도가 어떻든 자본주의에서는 잘 팔리는 게 최대선이다. 이 점을 인지하지 못하면 그럴싸해 보이는 마케팅에 우리의 욕망은 쉽게 솔깃 거린다.


 종종 주름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노동자 인터뷰를 하면서 당신의 손 마디마디에 깃든 세월의 흔적을 가늠한다. 어른다운 어른의 입꼬리를 따라 핀 주름을 보면서는 입술을 따라 피었을 웃음을 떠올린다. 고요한 숲에서 나무의 흔적을 톺아보듯 아름다운 인간에게 핀 나이테를 감각한다.


 슬프게도 내가 아름답게 바라보는 존재들은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는 모양이다. 어느 봄날에 나는 꽃보다 예쁘게 핀 할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사랑하는 우리 할머니가 내 눈에는 벚꽃보다도 고와서 함께 사진을 찍자고 했다. 할머니는 인상을 찡그리고 손사래를 친다. 젊고 어린 나의 얼굴 옆에서는 할머니가 늙어 보여서 사진 찍고 싶지 않단다. "할미 늙은 얼굴 꼴 보기도 싫다."라고 고개를 젓는다. 그렇지만 나는 할머니의 주름보다 찬란한 미소가 보였고, 가장 좋아하는 옷을 꺼내 입은 할머니가 예뻐서 간직하고 싶던 건데. "할머니가 얼마나 예쁜지 할머니만 몰라!" 하면서도 혹여 기분이 나빴을까 싶어 성급히 화제를 돌린다.


  문득 머리가 멍하다. 우리 할머니만이 손사래를 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안티에이징 산업의 '비포' 사진과, 늙기를 두려워하는 젊은이들이 동시에 세차게 고개를 휘젓는다. 어떤 개인적 문제로 다룰 수 없는 사회적인 흐름을 지켜본다. 주름이 개선되어야 하는 존재면, 주름진 모든 존재들은 부족한 존재인가? 피부가 깨끗해야 하는 존재라면, 화상을 극복한 흉터는 '흉'한 것인가? 결국, 늙는 게 추한 것이면 우리 모두는 추함을 향해서 하루하루 나아가는 것인가? 이를 비롯해서 완전무결함을 논하는 사회의 관점에 표창처럼 질문을 꽂는다.


 어릴 적에는 두 손가락의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나 인간극장 프로그램이 인기가 많았다. 고난을 극복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 공감대가 남아있던 시기다. 그렇지만 현시대에서는 육각형 인간을 비롯해 태초부터 완전무결하고 타고난 존재들이 이야기들이 각광받는다. 물론 시대적 무력함이나 미디어의 발달에 따른 우상화와 같은 복잡한 배경이 있겠지. 모르는 게 아니다. 어느 시대나 이면은 있으나, 다만 동시대는 확실히 다르다. 문해력 저해와 사회적 무력감까지 더해지며 그 양상이 확실히 다르다. 사회적 현상에 대해 반문하는 긴 칼럼들이 '네 다음 노인' '네 다음 장애인'처럼 단순한 조롱들에 스러진다.


 슬프다. 그냥 슬프다. 분노를 표출하거나, 혁명을 일으킬 생각도 없다. 정의라는 깃발을 펄럭이며, 상술에 속아넘어가지 말라고 할 생각도 없다. 몹시 슬프다. 슬픈 이유는 하나다. 내가 아름답게 바라보는 존재들이 그들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모양이라서. 그래서 슬프다. 아름다움이 시간의 흐름으로 판단되는 게, 그래서 우리 할머니가 당신의 거울 보기를 꺼려 하는 게 슬프다. 시간이 지나고 단단해진 네가 나는 좋은데 너는 자꾸 그 사이에 얼굴이 주름이 졌다며 속상해한다. 너를 만나고 집에 가는 길에 나는 빈지노의 아쿠아맨을 들으며 가사를 흥얼거린다. 너의 얼굴과 몸이 영원할까, 너의 얼굴과 몸이 영원할까, 너의 얼굴과 몸이 영원할까.


 아무래도, 시대의 거울이 내가 아름답게 바라보는 존재들의 아름다움을 반사하는 모양이다.

작가의 이전글 좋은 길은 맨발로 걸어야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