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셋의 봄도 지나가는구나. 한 계절이 마무리되고 다음 계절의 특징이 곳곳에서 목격될 때마다 나 역시 나 자신의 계절을 생각한다. 나는 어떤 계절에 와 있으며, 내가 지금 봄이라면 늦봄인가 초여름인가, 또 무엇에 가까운가 끊임없이 고찰한다는 뜻이다.
진로 고민을 하고 있다는 말을 좀 어렵게 했다. 경험 속에 뛰어들고 그저 파도를 타는 데에 집중하던 1,2학년은 지나갔고 다음 목적지를 생각할 때. 고학년의 삶에 접어들며 대학 이후의 생활을 고민하지만, 그럴수록 우선 '어떤 회사'에 갈 것이냐가 아니라 '나'는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고 싶어 하는지에 관한 스케치가 우선되어야 함을 느낀다. 즉 '세상에게' 나를 설명하는 방식을 고민하기 전에, 실오라기 하나의 거짓됨 없는 날것으로 '나 자신에게' 나를 설명하는 게 우선이다.
나에게 맞는 길을 찾으려면 길을 알기 전에 나의 발을 보아야 한다. 사회나 세상이 만든 신발을 벗기고, 족형을 관찰하고, 맨 발바닥으로 길을 밟아보고 길을 감각하며 기본이 되는 것들을 잘 알아야 한다. 왜 이렇게 기본 작업에 품을 들이느냐.
살아가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 말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고 싶기 때문이다. 주체성을 강조하고 거창하게 살겠단 다짐에 가깝기보다는, 실은 그런 세상의 흐름에 잔잔히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라 그렇다. '고등학교 졸업했으니 대학 가야지, 대학 갔으니 기업에 들어가야지' 하는, 그런 삶이 안 맞다. 즉 남이 선물해 준 꼬까옷을 그냥 예쁘게 입고 다니는 온순한 댕댕이가 있고, 지 맘에 안 들면 주인이 줬든 간식을 주든 찢어발겨버리는 지랄맞은 치와와가 있는데 굳이 따지면 후자라는 거다. 게다가 그 길이 실패하더라도 내가 선택했다는 주체성 하나만으로 그 모든 부작용을 감당할 줄 아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대학에 와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는, 정말 세상에 나 같은 사람밖에 없는 줄 알았다. 그러니까, 생각이 많고, 다가오는 사람과 사물들 모두를 낱낱이 분석하며, 늘 어떤 이론이나 분야에 관심이 있어서 매 하루가 어떠한 실험의 연속인 줄 알았다. 그리고, 여러 가지 모순적이고 복합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자아분석을 하지 않으면 삶을 영위할 수가 없는 그런 사람들인 줄 알았다. 근데 아니더라. 담백하고 현실적인 사람들의 장점을 깨닫던 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적응하는 데에 집중한단 걸 알았을 때의 충격이란.
차차 알아가고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통계가 쌓여가면서, 특히 성인이 되자마자 프로이트, 융, 아들러를 비롯한 심리학 이론에 푹 빠지면서는 세상을 조금 더 알게 됐다. 또한 나와 아주 다른 사람들과의 친밀한 관계가, '사람은 정말 다르구나!'라는 쉬운 명제를 온 감각으로 깨닫게 했다. 이렇듯 폭넓은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이라는 표본이 어떤 유의미성을 지니는지를 감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게 개인 백지원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우선은 나의 소수성을 알게 되었다. MBTI의 비유를 들자. 인구수로 따질 때, E가 I보다 2배 많고, S가 N보다 3배 많다고 한다. 이는 전 세계 통계고, 우리 한국 기준으로는 E,I는 비슷하고, S가 N의 2배 정도 된다고 한다. 예를 들어, I이고 N인 나는 '통계적으로 소수'에 속한다. 외에는 매 검사에서 나오는 극단적인 일부 지능들과, '특이할 정도로 강하다'라는 문장과 함께 나오는 특성들도 '통계적으로 소수'에 속한다. 게다가 매번 적성 및 지능 검사에서 나타나는 나 자신의 모순. 예를 들어, 높은 내향성과 외향성이 동시에 있다거나, 기업가적 자질과 연구자적 자질이 1,2위를 다툰다거나와 같은 부분. 즉, 극단적인 소수성끼리의 충돌도 자신의 다면적임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이다.
그러니 나에게는 자연스러운 게, 다수에게는 또라이처럼 보일 수 있단 것이고, 세상에 당연한 게 나에게는 견딜 수 없는 궁금함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전 포스팅에서 말했듯 소수성은 반드시 고독함을 동반한다. 뛰어난 화가 고흐가 정신병을 앓다가 권총 자살을 한 것처럼, 초인과 같던 니체가 10년 동안 정신병을 앓다 미쳐버린 것처럼.
여기서 끝냈다면 나는 '남들과 다른 나'에 취한 또는 '니체 호소인'의 모습으로 마무리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이 둘이지만, 나는 이 둘을 닮고 싶지 않다. 즉 만약 내가 소수라 하더라도 고독하고 싶지는 않다.
'부끄러움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로 시작하는 명저, 인간 실격. 스무 살 때 읽은 인간 실격에서 내 일기장의 문장들을 만났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실은 무척 공감하며 읽어나갔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나는 결심했다. '나는 이렇게 살지 말아야겠다.'라고. 나는 미쳐버리고 싶지 않다. 그저 세상의 즐거움을 감사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기쁨을 균형감 있게 누리면서 어느 날 우연처럼 갑자기 죽는 것이 인생의 소망이다.
무엇보다 멍청하기 싫다. 사회적 지능도 지능임을 믿는다. 자신만의 세상에 과도하게 취해 대중을 우매하다고 생각하다는 게 더 멍청해보이고, 타인에게 자신의 옳음을 강요하는 게 얼마나 숨막히는지도 알기에 경계한다. 그렇다면 독특하되 조화로운 그런 삶은 어떤 명제로부터 구축되는가.
진리를 향하여 헤겔의 정반합 논증을 하겠다. 즉 역설적으로, 나의 평범함을 제대로 인식하는 데에서 진테제가 나온다. 테제와 안티 테제의 논리적 관계로 결론이 도출되는 이러한 '정반합의 원리'가 세상의 이치를 찾는 데에도 적용이 된다. 다시 생각해 보자, 내가 모든 분야에서 소수이며, 혹은 우월한가? 아니다. 내가 우리 학과에서는 유난히 독서와 철학을 좋아하는 사람이어도, 철학 수업에 가면 평범한 수강생이 된다. 이 외에도 나는 아주 수많은 평범함으로 구성된 ‘평범한 사람’이다. 다만 나 자신이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나의 역량과 특성이 완전히 다르게 해석된다는 뜻이다.
또한 소수성과 우월성은 다르다. 예를 들어 나는 '직관력'이 특이할 정도로 강하지만 이게 '우월한' 건 아니다. 오히려 디테일을 잡아내는 '현실성'이 특이할 정도로 부족하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혹은 '분석력'이 뛰어나더라도, 내가 매일 곰돌이를 제작하는 일을 해야 한다면 이는 월등한 능력이 되지도 않는다.
평범함과 독특함의 이분법적 분석을 뒤로 하고, 개별성의 특질도 이쯤에서 언급해야겠다. 오직 나만이 내가 될 수 있다. 누가 내가 쓰는 문장을 그대로 가져가도, 나 같은 '글'은 만들어낼 수 없고, 나를 따라 하더라도 '나 자신의 고유성'을 절대로 가질 수가 없다. 동시에 나는 남이 될 수 없다. 내가 에밀리 라타이코프스키의 신발을 따라 사도 그녀의 스타일은 살 수 없고, 카르푸셴코의 렌즈를 빌려 써도 그녀와 같은 사진은 찍을 수 없다. 이 깔끔하고 당연한 두 명제는 헛된 곳에 에너지를 쓸 필요가 없게 한다. 타인을 의식하고 부러워할 필요도, 하나도 재미있지 않은 걸 억지로 붙잡고 있을 필요도 없으니까. 이 고유성에 대한 확신과 존중은, 나를 깔끔하게 타인으로부터 분류하면서, 한편 내가 타인과 세상과 적극적으로 교류하게 하고, 늘 폭력적인 태도를 띠지 않도록 도와준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다. 능력을 발휘하고 싶거나 자신이 꼭 필요한 곳에서 일을 하고 싶다면, 우선은 자신이 세상과의 통계에서 어느 분야에서 소수이고 어느 분야에서 다수인지를 잘 알아야 한다. 이에 더해 나의 소수성, 또는 다수성이 그 모집단에서 '좋음'이 되는지 '별남' 이 되는지까지 파악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덧붙이자면, 정확한 실험 결과를 위해서는 모집단을 어떻게 설정하고, 그 기준은 무엇이며, 그 통계 결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아야 한다. 당연하지만 촘촘한 판단 기준과 충분한 표본, 반복적이고 논리적인 전개 과정도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내가 상대적으로 가장 특별하면서도, 유익한 존재가 되는 자리를 찾을 수가 있다. 이쯤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 나만큼 남 또한 아주 특별하고 평범하다. 아비치의 'lonely together'라는 노래 가사처럼, 모두가 다 함께 외로운 것이 세상이다. 그러니 별나게 외로워할 필요도, 별나게 함께일 필요도 없지 않을까. 개별성에 대한 명징한 인식으로 이 고유성을 지키되, 세상과의 상대성을 잘 조율해가며 자신의 절대성을 아주 천천히 쌓아가는 것이 삶의 '진테제' 에 가까워지는 길이 아닌가 생각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