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숲에서 속삭임
며칠 전부터 눈물이 자꾸 나서 걱정이 되었다. 기약 없이 오래 못 볼 테니 마지막은 좋은 얼굴로 헤어져야 하는데 어쩌나.
그는 서울에 있고, 내일은 나도 서울에 간다. 이미 일주일 전에 그의 제안으로 도착지를 용산역에서 서울역으로 바꿔 두었다. 변경 후에 앱으로 여정을 공유했기 때문에 그도 도착 시간을 알고는 있을 것이다.
몸도 안 좋은데 내일 말고 모레 가자. 앞으로는 카톡에 아무 얘기도 보내지 말자. 이제 만나지 말자. 다 그만두자.
.. 생각만 할 뿐이다. 실제로는 기차표도 무엇도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다.
하나 지키고 있는 건, 카톡에서 그의 말에 아무 대답도 아직 하지 않은 것이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는 하트 아이콘 표시가 내가 보낼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이라는 것을 그는 알까. 아이콘으로 반응하는 건 상대에게 알림이 뜨지 않는다. 그는 아마도 글을 쓰고는 이미 지워버려서 내 반응은 못 봤을지도 모르겠다. 부인 분이 다시 전화를 볼 수도 있으니까.
내일 그가 나올까, 어떻게 마주해야 하나, 쓸데없는 생각들만 계속 맴돈다.
다음날,
어떻게 할 생각인지는 몰라도, 여전히 그에게 전화도 카톡도 아무 말도 보내지 않은 채 기차를 탄다. 그가 올까 안 올까 머릿속으로만 궁금해할 뿐이다. 쪼개어 쓸 시간도 없을 정도로 요즘 일이 바쁜데, 다른 데에 휘말려 지낼 여유가 어디 있냐는 이성의 차가운 지시를 들으면서.
"곧 열차 출발 하겠네요.
1시 33분 도착이죠?
서울역 KTX 출구에서 기다릴게요..."
그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네 방금 출발했어요."
파삭. 이성이 깨진다. 보통의 도덕 기준을 지키려고 노력이나마 하는 나지만, 하고 싶은 건 해야 하는 내가 더 아직은 강한가 보다. 나중에 어찌 될지언정 오늘은 그를 봐야 되겠다.
그냥 일반적인 친분이었다가 감정이 점점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때만 해도 별 일 아니었다. 메시지를 주고받거나 만나서 차를 마시거나 하는 보통의 만남 몇 번뿐이었어서. 그를 알게 된 건, 내가 있는 곳에 그가 잠시 머물러 있었을 때였다. 늘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머물러 있다가 떠나간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 후 개인적으로 다시 만난다는 것은, 이제껏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저 인생 곡선에서 약간 위쪽에 찍혀 흘러갈 희미해질 점이었다.
기회를 만들고 응하며 다시 만나게 되고, 마음이 달라지니 욕심도 커졌다. 잘 가라는 인사로 헤어질 땐 안아주고 싶고, 무릎 위에 올려진 그의 움직거리는 손을 잡아보고도 싶은데, 그런 행동은 안 될 것 같으니 그저 가만히 보기만 한다. 그는 부인이 있으니까, 아무것도 지금은 하지 말자. 스스로를 다독인다.
서울역에 도착하고 기차에서 나오는데, 마주하는 순간이 그려지면서 얼굴도 보기 전에 웃음이 배어 나온다.
낯선 이들 속에서 그가 나타났다. 내 얼굴 안 쪽 어딘가를 깊이 살피듯 바라본다. 메시지를 보냈던 그제도 대꾸 없던 나였어서, 안 올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상황 계산하며 메시지 보내기 싫었다고 투덜거리는 투로 말하고 말았지만, 마음이 아프다.
꽃은 내가 좋아하는 노란색으로 골랐고 다른 색도 하나 더 추가했으며, 꽃집 직원 분이 리본도 하나만 달아주셔서 노란색으로 하나 더 해달라고 했다며, 그는 내게 준 꽃다발의 과정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나는 진상 손님이라며 말하곤 말았지만, 사실 그가 나에 대해 생각한 것이 맞지도 않지만, 나는 그러한 그의 따뜻하며 자세하고 솔직한 표현을 좋아한다. 많이.
갈 곳이 있긴 한데, 밥을 먼저 먹자기에 나는 어제 지도를 보며 정해둔 몇 군데 중 한 곳으로 갔다. 예전에 그가 했던 말대로 우리는 서로 아주 다른 듯 하지만 비슷하기도 하다. 나는 여러 후보지를 알아두었고 그는 목적지와 동선을 정해 왔을 것이다.
그는 내가 가고 싶다고 했던 명동 성당에 가자고 한다. 서울역 뒤편에서 명동 방향으로 걸어간다. 드디어 공사가 끝났다며 부지런히 오가던 서울로를 오랜만에 걸으니 익숙한 풍경들이 반갑고 생각보다 꽤 많았던 추억들이 이어서 떠오른다. 아픈 것도 추위도 모르겠고 그냥 좋기만 한 것이 그래서일까, 그를 마주해서일까?
그는 서울로가 생기고 나서는 처음 온다며 가는 방향을 몇 번 묻더니, 성당 근처에 오자 주저 없이 걸어간다. 성당 안에 들어가서 의자에 앉길래 나도 따라서 옆에 앉는다.
내 오른손을 가져가 그의 두 손안에 넣고선 기도를 하더니 다시 제자리로 돌려준다. 내용은 모르지만 이렇게 기도를 드려도 괜찮은 건가? 어쨌든 힘들게 애쓰고 있으니까 우리를 너무 나무라지는 말자.
어디서든 가만히 있으면 자꾸 눈물이 흐른다. 눈물을 닦고 있는 나의 머리를 그는 조용히 몇 번 쓰다듬어 주었다. 아마 그도 내게 마음대로 닿일 수 없는 것이겠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
가정은 아무 소용없는 일일 뿐, 지금 상황이 이러한 것에 무슨 수가 있을까. 하고 싶었던 말은 뭐가 됐던 입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단지,
"이제 아무 연락도 할 수 없게 됐어요. 그냥 기다릴게요."
두서없이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온다. 기다린다는 말은 또 왜 나오지.
"기다리지 말아요. 내가 찾아갈게요."
주저 없이 나오는 그의 답에 나는 또 눈물이 나온다. 또 연결되지 않는 이상한 말이 나온다.
"오늘은 내가 울 거니까 울지 말아요."
저번에 같이 뮤지컬 '시라노'를 봤을 때는 그가 눈물을 흘렸었다. 훌쩍거리는 다른 사람들도 종종 있었는데, 그날따라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깊은 감흥이 없기도 했고, 그가 훌쩍거리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나오려던 눈물도 들어간 것 같았다. 전에 누군가 '옆에서 우니까 울 수가 없어요.'라고 하던 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강하지 못한 나라도 씩씩하게 옆을 지켜주고 싶었나 보다. 적어도 일 년 치는 감성이 충전돼서 좋았다며 아직 주변이 붉어져 있는 눈으로 그는 말했었다.
그래도 마지막은 괜찮은 얼굴로 웃으며 인사했다. 덤덤하게 각자의 길로 나뉘어 떠나 왔지만, 나는 누워있는 지금도 아직 명동성당 즈음에서 서성이고 있다.
그는 늘 나를 배려하는데 나는 떠올려 볼수록 내 기분대로만 하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