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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ackMatter Jun 04. 2024

기억의 표면적과 추락의 항력

추락은 천천히, Blonde, 릴리 슈슈의 모든 것 리뷰

추락은 천천히

BrokenTeeth

2023. 02. 23

Best Tracks 138, 노을폭격, Spring, 잠수병







Review by BlackMatter

★★★★ 5/5


추락에는 가속도가 함께한다. 추락하는 물체의 낙하 높이가 높을수록 복가속도로 인해 추락 속도는 점점 증가하고 결국 거대한 충격력을 만들어낸다. 사랑도, 인생도 마찬가지다. 거스를 수 없는 중력에 의한 추락은 아픔만을 만들어내고, 이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우리를 절벽으로 몰아낼 때,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언제 끝날지 조차 알 수 없는 추락에 대비하는 것뿐이다. BrokenTeeth의 멜랑콜리한 슈게이징 앨범 추락은 천천히의 화자는 이별을 겪는다. 그리고 그는 아쉬움과 미안함이 남는 사랑이 으레 그렇듯 후회와 미련이라는 중력에 의한 추락에 돌입한다. 그러나, 이 추락은 절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추락은 천천히 속 화자는 이별의 아픔을 애써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억의 표면적을 줄여 최대한 빠른 속도로 바닥과 충돌하기보다는 후회와 추억, 그리고 기억의 미화가 선사하는 아픔을 모두 끌어안고, 그것들을 하나하나 펼쳐보며 천천히 추락을 만끽한다. 그리고 이 되새김질의 과정에 혼잡한 이펙트들의 시너지가 만들어내는 부드러운 불협화음과 조용하지만 강력한 보컬이 만들어내는 멜로디로 청자들을 초대한다. 되새김질을 마친 화자의 추락은 더는 추락이 아니다.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펼쳐가며 항력을 만들어냈고 이제는 아침이 밝아오기를 바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기에, 비행의 형태에 가까워진 것이다. 그렇기에 잠수병 속 화자는 이제 더 이상 밤이 두렵지 않다. 느린 추락 끝에 이제는 다시 날아오를 수 있게 되었으니까.


Blonde

Frank Ocean

2016. 08. 20

Best Tracks Nikes, Self Control, White Ferarri, Futura Free






Review by BlackMatter

★★★★ 5/5


여름밤의 공기는 특별하다. 한 해의 절반이 지나갈 때인 여름바람의 내음과 습도 그리고 광도는 매미 울음을 안주로 기억의 회포를 풀게 한다. Frank OceanBlonde는 그런 앨범이다. 여름밤이라는 핑계로 아픔으로 남았던 이별의 기억을 슬며서 꺼내놓는, 그런 우발적이고 개인적이지만 아름다운 기록. 그토록 개인적인 만큼 블론드에는 오션의 지난 사랑의 모든 순간이 담겨 있다.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던 순간을 회상하는 Ivy, 이별의 후유증을 겪는 자신에게 충고하는 어머니의 음성이 담긴 스킷 Be Yourself를 지나 Self Control에서 오션은 다시 옛 연인을 마주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아픔을 마주하기로 결심했을 때 돌아온 것은 자신을 UFO를 보듯 쳐다보는 익숙한 사람의 낯선 시선에서 오는 새로운 상처뿐이었다.


그렇게 고통의 Nights를 지새운 오션은 어머니의 충고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듯하다. Solo (Reprise)에서는 더이상 High해지지 않는다며 애써 고통을 회피하려 하지 않고, Pretty Sweet에서는 신을 통해 치유와 회복의 방식을 찾은 듯한 모습도 보여준다. 마침내, Close To You에서 오션은 클레오파트라로 언급되는 자신의 연인에게 다시 연락할 용기를 찾는다. 너와 함께했던 기억들과 우리의 꿈들을 되돌아보았다고, 고통스러웠지만 내 마음이 황폐(Devastated)해지지는 않았다고. 또한 마지막 트랙 Future Free오션은 어머니에게 충고를 듣지 않아서 미안하다고, 이제는 내 자신의 모습을 (Be Yourself) 되찾겠다고 반등을 선포하기도 한다. Odd Future 멤버들과의 인터뷰가 담긴 녹음본을 통해 아직은 너와 내가 함께한 수 광년 떨어진 평행세계를(White Ferarri부터 Godspeed까지의 곡에서 언급된다.) 꿈꾸지만, 그래도 너와의 기억을 하나하나 되짚어본 덕에 다시 일어날 수 있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또 한명의 예술가가 기억의 표면적이 만들어내는 항력과 추락 속도의 상관관계를 몽환적이고도 아름다운 선율로 표현해냈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이와이 슌지

2001. 10. 06













Review by BlackMatter

★★★★ 5/5


누군가에게 교실은 지옥이다. 장밋빛이어야 할 학교생활이 누구에게는 고통스러운 잿빛 기억들의 연속으로 남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역작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속 이 불쌍한 양들의 유토피아는 릴리 슈슈였다. 에테르를 노래한다고 알려진 컬트적인 팬덤을 가진 이 아티스트는 상처받은 어린 양들에게 유일한 피난처가 되어줬다. 호시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유이치도, 원조교제를 강요받는 츠다도, 심지어는 이 모든 불행을 주도한 호시노조차도 잿빛 인생 속에서 릴리 슈슈의 에테르로 도망쳤다. 그리고 그 속에서, 현실의 추악한 기억을 잊고 자신만의 벙커를 만들었다. 그 속에서는 안전할 것이라 믿으며.


마찬가지로 학교폭력에 시달리던 쿠노도 다르지 않은 듯해 보였다. 쉬는 시간에는 홀로 피아노 앞에 앉아 드뷔시를 연주하고, 호시노에게 처음으로 릴리 슈슈를 알려 주었던 예쁘장한 한 소녀. 여느 아이가 그렇듯 냉담한 세상의 횡포 아래 가련히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버텨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너무나 당연하게 부서져버렸다. 유이치가 다른 생명의 목숨을 끊는 경험을 겪게 되었고, 츠다는 자유롭게 날아오르기 위해 투신하였으며 호시노는 자신이 세운 죄악의 왕국 속에서 홀로 남은 채 붕괴해버렸다. 안전할 것만 같았던 에테르 속 벙커가 외파는 견뎌냈지만 내파를 대비한 설계는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쿠노는 달랐다. 다른 아이들이 괴로움에 못 이겨 자신들이 세운 벙커 속으로 도피할 때, 유일하게 현실을 직시하며 추락의 두려움을 버텨냈던 것이다. 네 명의 아이들 중 유일하게 에테르를 진정으로 이해했기에, 기억의 표면적과 추락 속 항력의 상관관계 또한 알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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