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을 이해하기 위해 필름으로 돌아가다.

내가 필름을 찾게 된 여정

by 흑조필름

나는 필름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물론 20년 전에 어른들이 찍는 걸 보기는 했다. 가족들끼리 바닷가나 놀이공원에 놀러 갈 때면 어머니가 종이갑에 둘러싸인 일회용 카메라로 나를 찍어 주었던 게 생각이 나고, 그 사진은 여전히 집에 남아있다. 그 뒤로 오랜 시간이 흐르고 어영부영 내 진로가 정해질 때까지 나에게 필름은 그냥 없는 단어였다.


대학교에서 내 전공은 영상편집이었는데, 과거에 필름을 잘라 편집을 했었다는 역사를 배우며 필름에 대해 다시 듣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 이미 필름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카메라를 빌리러 학교 기자재실에 가면 디지털카메라 외에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디지털로 이미지를 만들고 영상을 작업하는 기술을 배웠고 필름은 다시없는 단어가 되었다.


군대를 다녀오고, 대학 졸업을 하고 곧바로 취업을 하게 되었다. 영상 편집을 전공했지만, 나는 영상의 컬러를 만드는 DI(영상 색보정)에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영상 색보정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에 들어가 색을 다루는 기술을 배우고 익혔다. 아마 5년 동안 회사를 다녔던 이 시기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뜨거운 열정을 쏟은 시기가 아닐까 한다. 하이엔드 디지털카메라인 아리 알렉사(Arri Alexa), 레드 카메라로 촬영된 영화와 광고를 작업하며 디지털 이미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연구했다. 그리고 혼이 담긴 컬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디지털로 이미지를 완성하는 직업이니 당연히 디지털은 나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디지털이 필름을 뛰어넘었고, 필름은 구시대적인 유물이라 생각했다.


5년 동안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고, 퇴사를 했다. 이전 회사보다 훨씬 작은 규모였지만 내 작업실을 만들었고 정말 심혈을 기울여 감사한 마음으로 작업해오고 있다. 이제 컬러는 내 인생이 되었고 어디서 본 적 없는 색, 영혼이 깃든 색감을 만들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작업이 없는 날에도 언제든 모니터 앞에 앉아 색을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며 연습했다. 영화든 광고든 정말 많은 사람들이 순도 높은 '필름룩'을 원했다. 당연히 그 필름룩이라 불리는 '필르믹한' 이미지는 너무나도 많이 만들어 봤기에 어떤 특성을 갖고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스쳤고, 그때 나의 커리어는 다시 시작되었다.


5년이 넘도록 필름룩을 만들겠다는 사람이 필름을 한 번도 다뤄본 적이 없다니.


나는 디지털이 이미지를 만드는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인수분해해서 하루종일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한 우물만 팠다. 그런데 이 모든 기술은 필름에서 기인한 것이다. 잠시 모든 것을 잊고 홀린 듯이 필름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나는 필름 카메라를 알아보고 있었고, 수소문 끝에 중고 필름 카메라를 하나 구하게 되었다.



불편하더라도 완전 수동인 기계식 카메라를 구하는 게 연습하기 좋겠다 싶었고, 오랜 세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고 하여 니콘의 FM2를 선택했다. 창의적이고 개성 있는 이미지를 만드는 데 장비와 기술적인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가장 기본이 되는 카메라와 렌즈로 잘 찍을 수 있다면 아무 문제없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촬영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카메라를 다루는 것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대비와 색조를 만드는 사람이었기에 자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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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결과는 처참했다.

나의 첫 필름롤은 어떤 사진을 가져와도 전부 초점이 나가있고 그나마 초점이 맞는 것들은 아무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는. 그저 영혼 없는 사진들 뿐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한동안 작업이 없는 날이면 무작정 나가서 닥치는 대로 나가서 찍고 들어왔다. 나가기만 하면 챙겨간 필름은 모두 다 쓰고 그날 바로 현상을 맡겨서 어떻게 나왔는지 확인했다. 스캔된 사진을 친한 촬영감독 형에게 보내서 피드백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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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수백 장을 찍어보고 어떻게 하면 원하는 이미지를 얻을 수 있을지 대략적으로 알게 되었다.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내가 상상하던 톤 앤 매너의 이미지가 간혹 얻어걸리는 날들이 있었다. 디지털 이미지를 더 깊게 이해하고 싶고 내 커리어에 도움이 될까 하여 시작한 필름이었지만, 필름은 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 매력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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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을 찍더라도 사진이 어떤 걸 표현하고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가 담겨있는 사진이었으면 한다. 필름의 특성을 배우기 위해, 그리고 그것을 디지털에 적용시키기 위해 촬영하고 또 촬영한 것을 작업실로 가져와 그 결과를 뜯어보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눈에 보이는 대로 찍히는 것이 중요했고, 눈에 보이는 것보다 조금 더 나은 보정으로 증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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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눈에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상상한 대로' 사진을 만들게 되었다. 디지털은 LCD 화면에 내가 촬영하고 있는 이미지가 그대로 나오기 때문에 얼마든지 예측할 수 있고, 또 원하는 이미지를 쉽게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필름은 뷰파인더에 눈을 대고 촬영할 때 현상되어 나올 사진을 상상하며 찍는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디지털카메라와 필름 카메라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필름으로 찍는다는 그 자체가 예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취미이자 커리어를 위해 시작한 필름으로 정말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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