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은 예측한대로 찍히고, 필름은 상상한대로 찍힌다.

필름 카메라로 담아낸 한강

by 흑조필름

길 가다 흥미로운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면 뷰파인더를 눈에 갖다 대고 촬영했다.

필름이 너무나도 매력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로 더 잘 찍고 싶다는 생각만 하게 되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좋은 장비나 기술적으로 뛰어난 것보다, 어디서 무엇을 어떤 각도에서 찍을지 고민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래서 볼거리가 많은 장소를 정하고 각 필름 롤마다 주제와 테마를 정해서 찍고 보정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 때문에 너무 멀리 가지 못했기 때문에 걸어서도 언제든지 갈 수 있는 한강을 택했다.


디지털은 예측한 대로 찍히고, 필름은 상상한 대로 찍힌다.

정말로 그랬다.

뷰파인더를 통해 구도를 잡지만, 빛에 반응하는 필름은 어떤 느낌으로 담겼으면 하는 상상을 하면서 찍게 된다. 초점과 노출을 맞추고, 카메라가 흔들리지 않게 숨을 죽이고 서서히 셔터 버튼을 누르는 그때까지. 셔터가 열렸다 닫히는 건 정말 찰나의 순간이지만 그동안 정말 많은 이미지들을 떠올린다.

0009_0.png
0010_00.png
0017_00.png

필름은 중간톤이 정말 풍부하다. 그래서 중간톤 영역의 색들을 분해하고 다시 섞는 과정에서 다채로운 색들이 튀어나온다. 한강에 가면 항상 걷고 뛰는 사람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보이는데 그들이 갖는 활기차고 여유로운 시간들이 잘 담겨 나온 것 같다.


현상 후에 보정하는 과정에서 느낀 점은 강물과 자전거 도로의 색 대비가 예술적으로 명확하게 떨어진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파랑과 노랑의 보색 관계에 놓인 색으로 대비를 주면 화면 전체를 가득 차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나는 명암으로 대비를 만드는 것보다 색을 섞어 대비를 일으키는 것을 더 좋아한다.

0029_00.png
0030_00.png
0014_00.png
0017_00.png

보정을 하다 보니 문득 필름에 찍힌 그레인들이 점묘화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윤곽선의 경계를 문지르고 밝음과 어두운 부분의 경계들도 모호하게 만들었다. 나중에 기회가 있다면 대비에 관해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대비를 낮추기 위해 명부와 암부를 충돌시키게 되면 그 경계들은 부드럽고 곱게 표현되는 특성이 있다. 뷰티 광고나 아이돌 뮤직비디오를 작업할 때 이런 방법을 자주 쓰곤 하는데 필름으로 찍은 사진에 이 기법을 사용하니 사진이 아니라 회화처럼 느껴졌다. 사진인 건 분명한데 그림과 헷갈리는 이 지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이란 경계를 문질러서 모호하게 만드는 것이니까.

0031_00.png
0035_00.png
0018_00.png
0017_00.png
0013-08.00000000.png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필름이 잘 담아낼 수 있을까?

내가 찍은 것을 당장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상상하며 찍었고, 현상과 보정을 거치고 나면 필름은 생각지도 못한 결과를 가져다줬다. 지금까지 수많은 작업을 하면서 채운 내 머릿속의 컬러 팔레트를 계속해서 확장해 주는 것 같았다.

0018-31.00000000.png
0018-32.00000000.png
0013-06.00000000.png
0013-21.00000000.png
0013-36.00000000.png

이날 날씨가 정말 좋았었는데 모든 장면이 너무 예쁜 나머지 필름을 난사했다.

그러느라 일몰직전의 결정적인 장면을 담지 못했다. 하늘은 빨개지고 해는 저물어가는데 필름은 더 이상 와인딩이 안되고... 땅에 주저앉아 아쉬워하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것이 필름의 묘미이자 본질이 아닐까 한다. 내가 가진 것들을 다 써서 이미 지나갔다면 지나간 그대로 두는 것.


나는 목표를 세우고 계획을 만들었지만 절대 계획대로 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계획대로 되지 않았을 때 실망하고 자책하며 그때 그 순간을 지나치게 후회했다. 그런데 필름을 접하면서 이미 지나간 것에 연연하지 않는 법도 배웠다. 그래야 다음을 기약하고 다시 잘해볼 수 있다.

0014_13A.00000000.png
0018_17A.00000000.png
0024_23A.00000000.png
0022_21A.00000000.png

결국 그날 놓쳤던 그 장면이 눈앞에 아른거려 몇 주 뒤에 필름을 채우고 다시 한강을 찾았다.

이 날도 구름이 가득 껴있었지만, 일몰의 순간에 그 자리를 피해 준 구름과 투명하도록 맑은 공기에 감사한다.



아래 영상에서 무드에 어울리는 음악과 함께 이 날 찍었던 모든 사진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부디 여유를 갖고 천천히, 끝까지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디지털을 이해하기 위해 필름으로 돌아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