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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이 Jul 12. 2020

하진과 정훈, 오늘을 살다

드라마 <그 남자의 기억법> 을 보고

(사진 출처: MBC 그 남자의 기억법 공식홈페이지)

  한 남자는 모든 순간을 기억한다. 자신의 삶의 전부를 기억한다는 건 단순히 좋은 기억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 뿐만 아니라, 마치 그 때로 다시 돌아간 듯 그 순간의 대화, 촉감, 냄새 또한 선명히 되살아난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잔인한 죽음을 당한 첫사랑의 마지막 장면을 잊지 못해, 똑같이 눈 오는 날이 되면 숨이 막힐 듯한 공황 상태가 찾아오고 몇 년이 지나도 딱 '그 날만큼' 가슴이 아프다.

  

  한 여자는 살기 위해 자신의 가장 중요한 기억 중 하나를 잊었다. 가장 소중했기에 더 아프고 괴로웠던 친구의 죽음에 대한 기억을 통째로 지워버리면서, 자신의 가장 찬란하고 빛났던 시간마저 기억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 덕분에 극 초반의 하진은 더 단순하고 가벼운, '걱정 없이' 인생을 사는 인물 같아 보인다.


  이 두 사람이 만나 사랑을 한다. 처음엔 기억을 잃은 하진이 묘한 끌림에 정훈을 사랑하게 되고, 한없이 정훈을 끌어당긴다. 그 사이 정훈은 하진이 잊은 기억 속 인물이 자신의 첫사랑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진은 이미 정훈에게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사람이 되었기에 그 또한 아픈 기억을 잊지 못한 채 새로운 사랑을 하려고 한다. 두 사람의 사랑을 지켜보던 정훈의 주치의(라고 쓰고, 싸이코라고 읽는다...)가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네가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어.
넌 그럴 수 없는 사람이잖아. 넌 평생 서연이를 잊지 못하고 살 거 잖아.
어떻게 그런 상태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어. 그게 가능한가?

  이 말은 묘하게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렇게 생생한 기억을 가지고도, 그렇게 아프고 끔찍한 기억과 애틋한 감정을 가지고도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정훈은 그 기억을 가진 상태로 하진을 사랑한다. 결국 하진의 기억이 되살아나 하진이 그를 밀어내도, 묵묵히 기다리고 사랑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은 이별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 서로를 위해 다시 사랑하기로 한다. 헤어지지 않기로 한다.


  두 사람은 어떻게 기억을 딛고 성장할 수 있었을까? 하진과 정훈에겐 중요한 두 자원이 있었다. 바로, '사람'과 '지금'이다. 하진은 자신을 누구보다 소중히 여기고 함께 해주는 동생 하경이 있었다. 일보다는 하진의 존재 자체를 빛나게 해주는 소속사 대표 또한 있었다. 정훈에겐 따뜻한 기억들을 만들어 주려 애쓰던 어머니가, 여섯 살 때 혼낸 기억을 서른이 넘은 아들에게 사과할 줄 아는 아버지가, 실시간으로 나가는 뉴스보다 정훈이 먼저인 국장이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는 누구보다 서로를 사랑하는 둘이 있었고, 과거보다 중요한 '현재'가 있었다. 


  드라마의 말미, 더이상 과거가 아닌 지금을 살아갈 정훈이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난 이제 그 기억들을 마음에 새긴 채, 앞으로 나가는 방법을 안다.
내 안에 남을 기억들이 흉터가 아닌 추억이 될 수 있게
지금 이 순간을 아름답게 살아내면 된다는 걸 말이다.

  

  우리의 삶에도 비슷한 질문거리가 있다. 나쁜 기억과 아픈 기억을 잊지 않고도 우리는  살아갈  있을까?  기억들을 상처로 남겨두지 않고, 추억으로 만들어 오롯이 오늘을 살아낼 수 있을까?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나를 지지해줄 소중한 사람들과 우리가 살아갈 '지금  순간' 이기 때문이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과 현재를 살아가기로 마음 먹을 때, 그렇게 선택할 때 우리는 더이상 과거의 기억에 얽매이지 않은 채로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단단한 모습으로 잘 살고 있을 것 같은 정훈과 하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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